'조용한 한은'을 '국가 싱크탱크'로 바꾼 이창용…퇴임 일성도 "구조개혁"

4년 임기 마치고 퇴임…이임식서 "금리·외환개입만으론 한계" 지적
빅스텝·가계부채 하락 전환 자평…"후회 없다, 잘했다고 생각"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0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이임식에서 이임사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 2026.4.20 ⓒ 뉴스1 최지환 기자

(서울·세종=뉴스1) 전민 이강 기자 = 조용한 절간을 뜻하는 '한은사(寺)'로 불리던 한국은행을 지난 4년간 적극적인 정책 발언과 소통 강화로 '시끄러운 한은'으로 바꿔놓은 이창용 총재가 20일 퇴임했다. 그는 마지막 날까지 "제도적 개선 없이 외환시장 개입이나 금리정책만으로 환율을 관리하려 하면 더 큰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며 구조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총재는 이날 오전 10시 한은 별관 1층 강당에서 열린 이임식에서 4년간의 소회를 밝혔다. 임직원과 금통위원, 출입 기자단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이 총재는 회색 양복 차림으로 단상에 올라 약 10분간 이임사를 낭독했다.

그는 임기 중 추진한 정책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이라면서도, 아직 중동전쟁이 끝나지 않아 외환·금융시장이 충분히 안정되지 못한 채 자리를 넘기게 됐다며 마음이 무겁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여러분이 보여준 위기 관리 능력은 어느 선진국에 비해서도 손색없기에, 신임 총재님과 함께 외환·금융시장을 빠르게 안정시킬 것을 믿는다"고 했다.

이임식 이후 한은 별관은 이 총재와 사진을 찍으려는 직원들로 북적였다. 이 총재는 단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악수와 인사를 나눴으며, 사진 촬영을 원하는 직원들이 줄을 서자 직접 손짓으로 불러 모으기도 했다.

이 총재는 이임사 말미에 "오늘 드디어 엘리베이터를 타니 직원들이 먼저 인사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내가 한은을 많이 바꿔놓았다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10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 후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6.4.10 ⓒ 뉴스1 사진공동취재단
'직진 소통'으로 시장 예측 가능성 높여…K-점도표 도입

이 총재의 임기 중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통화정책 소통 방식의 전환이다. 그는 취임 직후부터 전임 총재들이 중시한 '전략적 모호함'에서 탈피해 정책 방향을 직접적으로 밝히는 '직진 화법'을 선보였다.

이처럼 시장과의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 2022년 11월부터는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 위원들의 최종금리 전망을 공개하는 포워드 가이던스를 도입했다. 이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점도표를 참고한 것으로, 이른바 'K-점도표'라는 이름이 붙었다. 올해 2월에는 구두로 제시하던 '3개월 내 금리 전망'을 '6개월 후 금리 전망'으로 개편해 소통을 한층 강화했다.

다만 금리 인상·인하 시기를 둘러싼 실기론도 일부 제기됐다. 2022년 미 연준이 급격하게 금리를 인상할 당시 점진적 인상 기조를 유지했던 점, 2024년 금리 인하 전환이 늦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대해 이 총재는 "금리를 많이 올렸으면 자영업자는 더 힘들고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도 망가졌을 것"이라며 "7월에 내렸으면 9월에 가계부채가 10조 원 가까이 늘어나고 서울 부동산값이 올라갈 때 어떻게 했겠느냐"고 반박했다.

이 총재는 지난 10일 마지막 금통위 기자간담회에서 "금리 결정과 관련해 금통위원들이 잘 해줘서 자기 자랑 같지만, 후회하는 것은 없다"고 밝혔다. "금리 조기 인하에 실기했다는 말도 많았고, 지나서는 너무 금리를 안 올려서 환율이 올랐다고도 하니 그냥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이 총재는 4년 임기 중 가장 보람된 순간으로 비상계엄 직후 대응을 꼽았다. 그는 "다른 사람은 못 했을 때 중앙은행 총재가 이런 얘기를 해서, 하나님이 나를 이 일을 하라고 보내셨구나 느낀 때가 계엄 직후"라며 "외신 인터뷰를 하면서 '헌재가 제대로 작동하면 경제와 정치가 분리된다'는 논리를 만들어 대응했는데 생각보다 잘 작동된 것 같다"고 회상했다.

공동락 대신증권 연구원은 "이 총재의 공과를 따져보면 사실 과보다 공이 훨씬 많다고 본다"며 "특히 계엄 사태 당시 경제 전반에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중앙은행 총재가 과감한 목소리를 낸 부분들은 꽤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0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이임식에서 임직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공동취재) 2026.4.20 ⓒ 뉴스1 최지환 기자
'시끄러운 한은' 표방…입시·돌봄·연금 등 구조개혁 의제 주도

이 총재는 중앙은행 본연의 업무 범위를 넘어 사회 구조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스스로 '시끄러운 한은'을 표방하며 20편이 넘는 구조개혁 보고서를 통해 정책 자문 역할을 강화했다.

대학 입시 개혁 화두는 재임 중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주제 중 하나였다. 한은은 입시경쟁 과열 완화를 위해 상위권 대학이 성적순이 아닌 지역별 비례선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돌봄 인력난 완화를 위해 외국인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자는 주장이나, 신선식품 가격 안정을 위해 구조적 수입 개방을 논의해야 한다는 제언도 이례적인 중앙은행 발언으로 화제가 됐다.

이 총재는 이임사에서도 마지막으로 구조개혁을 강조했다. 그는 "통화·재정정책만으로 경제 안정과 성장을 이루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며 "과거의 성공 경험으로 정책 당국의 역할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여전히 높아 양자 간 괴리가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외환시장 구조 변화를 근거로 제도 개선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이 총재는 "과거 외국인 투자자의 자본 유출입에 크게 좌우되던 외환시장에서 이제는 국내 기업·개인·국민연금 등 거주자의 영향도 크게 확대됐다"고 짚었다. 내국인 해외투자가 내외 금리차뿐 아니라 노동시장·조세정책·연금제도·글로벌 지정학적 위험 등 복합 요인에 의해 변동하는 시대가 됐다는 진단이다.

이 총재는 국민연금 뉴프레임워크와 관련한 소회도 털어놨다. 그는 이임식 이후 기자들과 만나 "서학개미 발언으로 많은 질책을 받았지만, 그 덕에 그간 어느 누구도 비난을 두려워해 언급을 꺼려왔던 국민연금 해외투자가 외환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공론화하고 제도 개선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저출생·저성장 문제 역시 단기 처방보다 노동·교육 분야의 구조개혁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뜻도 거듭 밝혔다. 반도체 호황에 따른 최근 외환시장 안정에 대해서도 "특정 산업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양극화라는 구조적 문제가 오히려 더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마냥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이 총재는 "4년 전 취임사에서 제시한 '통화·금융정책의 울타리를 넘어 국내 최고의 싱크탱크'가 되자는 마음은 지금도 같다"며, 한은이 교육·주거·균형발전·청년고용·노인빈곤 등 구조적 문제 연구를 계속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인플레이션 2%대 복귀·가계부채 안정 성과"

4년 임기에 대한 자평도 내놨다. 이 총재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가속화된 인플레이션에 맞서 역사상 처음으로 두 차례 빅스텝(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을 단행해 기준금리를 연 3.5%까지 끌어올렸다고 언급했다.

그는 "주요 중앙은행보다 먼저 인플레이션을 2%대 목표 수준으로 되돌린 데 자부심을 느낀다"며 "지난 20여 년간 상승하기만 했던 가계부채 비율을 처음으로 하락세로 이끈 것도 의미 있는 성과"라고 꼽았다.

비기축통화국 중앙은행 총재로는 처음으로 국제결제은행(BIS) 글로벌금융시스템위원회(CGFS) 의장을 맡은 것도 성과로 꼽았다.

이 총재는 이임사에서 "중앙은행에 대한 국민의 믿음은 결국 중앙은행의 실력이 결정한다"며 "지난 4년은 여러분의 뛰어난 실력을 확인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임직원들에 대한 감사를 전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서는 "나가서도 계속 해왔던 것처럼 경제평론, 자문활동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유튜브를 개설할 것이라는 보도와 관련해서는 "농담을 한 것을 진담처럼 쓴 것"이라며 "어떤 매체를 통해 얘기할지는 어떤 메시지를 줄 거냐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고 했다.

min785@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