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정부 산업정책, 직접 지원보다 민간 금융기관과 위험 분담해야"

"3년 연속 이자도 못 갚는 기업 17%…1년 내 정상화 8곳 중 1곳"
IMF '아시아 2050' 연설…탈세계화·산업 경쟁 속 성장모델 변화 주문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2026.2.26 ⓒ 뉴스1 사진공동취재단

(세종=뉴스1) 이강 기자 =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5일 "한계기업 문제와 산업정책 전환을 위해 신속한 시장 퇴출과 민간 금융 활용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가 특정 기업을 직접 지원하기보다 민간 금융기관과 위험을 분담하는 방식으로 산업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이날 태국 방콕에서 열린 'IMF 아시아 2050 콘퍼런스' 기조연설에서 최근 3년 연속 영업이익으로 이자를 갚지 못하는 기업(한계기업) 비율이 17%로 역대 최고 수준에 달했다고 지적했다. 정상화되는 기업은 8개 중 1개에 불과하며, 정부가 특정 산업의 상업적 성공을 보장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며 이 같이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한계기업 문제가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한계기업이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정부가 직접 기업을 선택하여 지원할 때, '비가 올 때 우산을 뺏는다'는 정치적 비난을 우려해 중간에 성과가 나빠도 지원을 끊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신속한 시장 퇴출이라는 구조개혁이 뒷받침되어야 확보된 자원을 새로운 산업정책 재원으로 돌릴 수 있다"며 "이러한 전환에는 상당한 정치적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정부가 직접 기업을 선별하기보다는 프로젝트의 위험도에 따라 민간 금융과 함께 리스크를 나누고, 지원 기업의 선정은 민간 금융기관에 맡기는 방식이 더 효율적"이라며 "지원받는 기업은 정부 지원 사실을 모르게 돼, 성과가 나쁠 때 민간 금융기관이 자금을 회수하여 정책 금융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산업정책의 대상도 제조업을 넘어 다변화돼야 한다"고도 말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제조업 비중은 26.7%로 OECD 평균(13.4%)의 두 배 수준이며 일본(20.6%)과 독일(18%)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또 미국과 중국에 대한 수출 의존도도 각각 약 20% 수준에 달해 글로벌 공급망 변화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는 구조라는 설명이다.

아시아 경제에 대해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 성장의 핵심 동력 역할을 해왔다"고 평가했다.

1970년대 약 20% 수준이던 글로벌 성장 기여율은 현재 약 60%까지 확대됐으며 같은 기간 아시아 1인당 국내총생산도 크게 증가했다. 이러한 성과는 제조업 기반의 수출 중심 산업화 전략과 글로벌 생산 분업 체계의 확대가 뒷받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성장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총재는 "세계화의 재편, 선진국 산업정책의 복귀, 그리고 제조업의 구조적 변화 등으로 인해 과거 아시아 고속 성장을 떠받쳐왔던 순풍이 약해지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역풍으로 바뀔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탈세계화 흐름과 지정학적 갈등 확산, 선진국의 산업정책 확대, 자동화와 인공지능(AI) 확산 등이 제조업 중심 성장 모델에 구조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선진국들이 제조업 자립을 강조하며 산업정책을 강화하면서 글로벌 경쟁 환경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에는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면 글로벌 시장에서 제품을 판매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지정학적 관계나 공급망 안정성 등 정치적 요인이 점점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총재는 이러한 환경 변화 속에서 정부의 산업정책 방식도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 동아시아 국가들은 정부가 전략 산업을 선정하고 민간 기업이 이를 실행하는 방식으로 빠르게 산업화를 이뤘지만 현재는 기술 최전선에 가까워지면서 정부가 특정 산업의 성공 가능성을 판단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는 기업을 직접 선별하는 방식(picking winners)을 떠나, 민간 금융기관과 위험을 분담하는 방식, 즉 온렌딩(On-lending)을 통한 간접 지원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향후 성장 전략으로는 산업정책과 구조개혁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공지능 등 전략 산업 육성이 중요하지만 저출산·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한 노동시장 개혁, 연금 개혁, 여성과 고령층의 경제활동 확대 등 구조개혁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세계화 재편과 기술 변화 속에서 아시아 경제의 성장 경로는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을 것"이라며 "아시아가 세계 경제 성장의 엔진 역할을 계속할 수 있을지는 각국이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밝혔다.

thisriver@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