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의 경고 "내수 부진, 단기 침체 넘어 중장기 성장 경로 훼손"

"지워지지 않는 흉터 효과…자본 축적 지연에 잠재성장률 하락 우려"
"국내 투자 외면하고 해외로 향하는 기업들…시장 신뢰 회복이 관건"

서울로봇인공지능과학관에 전시된 메타 휴머노이드 '마스크봇'ⓒ News1 권현진 기자

(세종=뉴스1) 이강 기자 = 내수 부진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기업의 투자 위축 등 수요 부진이 단순한 경기 변동을 넘어 경제의 성장 경로와 국내총생산(GDP) 수준 자체에 '영구적인 흔적(Scarring effects)'을 남길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은행은 4일 '한국의 성장에서의 영구적 수요충격의 역할' 보고서를 통해, 기업의 투자와 연구개발(R&D) 동력을 유지해 생산성 경로를 지켜낼 수 있는지가 중장기 성장의 사활을 결정할 관건이라고 분석했다.

외환위기·금융위기가 남긴 '성장의 흉터'…2010년 이후 상시화

연구에서 지목한 '영구적 수요충격'은 소비·투자 위축과 같은 경기 침체가 종료된 뒤에도 경제가 이전의 성장 경로로 회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적 타격을 뜻한다. 쉽게 말해 경기가 살아난 뒤에도 경제성장률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남는 현상이다.

실제로 보고서는 역사적으로 외환위기와 카드대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GDP 변동에서 영구적 수요충격의 영향력이 극명하게 나타난 것으로 분석했다. 특히 2010년 이후에는 뚜렷한 대외 경제 위기 상황이 아님에도 GDP 변동에서 영구적 수요충격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진적으로 확대됐다. 이는 수요 부진이 고착화될 경우 한국 경제의 중장기 성장 엔진 자체가 영구적으로 손상될 가능성이 커졌음을 시사한다.

연구는 영구적 수요충격이 기업의 투자와 연구개발(R&D) 지출 감소라는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장기 성장을 가로막는다고 설명했다.

먼저 투자 측면에서 보고서는 "영구적 수요충격은 투자를 지속적으로 감소시키면서도 고용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며 "노동투입(고용)은 유지되는 반면 자본축적 과정이 제약되면서 자본집약도(노동자 1인당 자본량)가 감소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분석했다.

즉, 일하는 인원은 그대로지만 사용하는 장비나 인프라가 낙후되어 생산성이 떨어지는 상황이다. 침체기에 위축된 설비투자가 경기 회복기에도 복원되지 않으면서 국가 전체의 자본 축적이 장기간 지연된 결과로 풀이된다.

R&D 측면에서도 우려스러운 흐름이 관찰됐다. 보고서는 "수요 충격이 R&D 지출을 지속적으로 위축시켜 기술 혁신에 악영향을 주고, 결국 경제 전반의 효율성을 뜻하는 총요소생산성을 감소시키는 요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이는 단기 실적 악화를 넘어 경제의 기초 체력인 기술력까지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경고다.

경기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에 수출용 컨테이너가 세워져 있는 모습. 2026.1.1/뉴스1 ⓒ News1 김성진 기자
FDI 둔화·ODI 확대…국내 투자 기반 '이중 공동화' 우려

이 같은 분석은 최근 체감 경기 지표와 투자 데이터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1월 전산업 업황 전망 CBSI는 전월 대비 1.7포인트(p) 하락한 89.4에 그쳤다. 지수가 100을 밑돈다는 것은 기업들이 향후 경기를 낙관보다 비관적으로 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물 투자 흐름도 부진의 늪에 빠졌다. 지난 3분기 외국인직접투자(FDI) 신고금액은 약 75억 70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23.1% 급감했다. 올해 1~3분기 누적 기준으로도 지난해보다 17.9% 줄어든 수치다.

반면 같은 기간 해외직접투자(ODI) 신고금액은 282억 90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42.4% 폭증했다. FDI 유입은 정체된 가운데 국내 기업들의 자본은 해외로 빠르게 빠져나가는 '투자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자본 유출 가속화가 국내 투자 기반을 잠식한다는 점이다. 국내에서 이뤄져야 할 설비투자와 자본 축적이 해외로 이전되면서, 한은이 우려한 '영구적 수요충격'의 전이 경로가 더욱 공고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박인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이 2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26년도 주요 RnD 배분, 조정(안)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5.8.22/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R&D 예산만으로는 부족…시장 신뢰 회복이 선행해야"

전문가들은 경기 회복 이후에도 GDP가 이전 성장 경로로 회귀하기 어려워질 가능성을 제기했다. 정부가 올해 35조 5000억 원의 역대 최대 R&D 예산을 편성했지만, 민간의 실질적 투자로 이어지기에는 여전히 장벽이 높다는 진단이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기업 입장에서는 R&D 투자의 불확실성에 대한 리스크가 크다"며 "경기가 위축된 상황에서는 기업들이 이런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감내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최근 투자 위축의 근본 원인으로 '시장경제에 대한 신뢰 저하'를 꼽았다. 김 교수는 "내수 부진에 정부의 개입까지 늘어나면서 시장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고 있다"며 "이 과정에서 자본과 인재가 해외로 떠나는 엑소더스 현상이 가속화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정부 주도의 R&D 방향성은 긍정적이라면서도, 민간 자본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려면 규제 완화와 시장 중심의 정책 기조를 통한 신뢰 회복이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thisriver@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