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 환헤지 다음 스텝은 기업 달러…'수출대금 국내 송환' 가능성 부상

'무역흑자=원화강세' 공식 깨져…수출 늘어도 환전은 줄어
수출기업에 환류 언급한 부총리…과거에도 유보금 '본국 송환'시 인센티브

원·달러 환율이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24일 서울 중구 명동거리의 환전소에 환율정보가 표시돼 있다. 2025.11.24/뉴스1 ⓒ News1 김도우 기자

(세종=뉴스1) 전민 기자 = 달러·원 환율 방어를 위해 국민연금과 전략적 환헤지를 논의한 정부가 다음 카드로 수출 대기업의 '달러 곳간'을 주목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국민연금의 환헤지만으로는 구조적인 환율 상승 압력을 막기에 역부족일 수 있어, 주요 기업들이 해외에 쌓아둔 달러를 국내로 들여오는 '자금 리패트리에이션(Repatriation·본국 송환)' 유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다.

25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8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등 주요 수출기업 경영진과의 간담회에서 과도한 원화 약세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구 부총리는 특히 "수출 이익을 국내에 환류·투자해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게 하는 선순환 구조가 작동하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금융시장에서는 외환당국이 국민연금과의 4자 협의체 가동에 이어 '다음 스텝'으로 민간 기업의 달러 공급을 유도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으로 전망한다. 구 부총리의 발언은 기업들이 해외 법인에 쌓아둔 달러나 수출 대금을 국내로 들여와 원화로 환전할 것을 우회적으로 당부한 대목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단순한 협조 요청을 넘어, 기업들이 해외에서 번 돈을 국내로 들여와 투자할 경우 세제 혜택을 주는 등 적극적인 '리패트리에이션' 유인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주요 수출기업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5.11.18/뉴스1 ⓒ News1 청사사진기자단
수출 늘어도 달러 쌓는 기업들…'무역흑자=원화강세' 공식 깨져

정부가 기업의 역할을 강조하는 배경에는 과거와 다르게 수출 호조가 환율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는 '수급 동맥경화'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민경원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2022년 환율 1400원 시대를 경험한 국내 기업들이 원화 약세에 대응해 외화 보유 비중을 확대하면서, 수출 경기가 회복돼도 원화 환전 수요는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그는 "무역흑자가 원화 강세로 이어지는 공식이 붕괴된 것은 기업 해외투자 확대에 따른 수출 실적과 달러 공급의 불일치 때문"이라며 "한미 관세협상에 따른 대미 투자와 생산기지 이전까지 감안하면 실물경기 달러 실수요는 빠르게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해외 투자 확대로 인한 결제 방식의 변화가 이를 가속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우리나라 수출 대금 결제 방식 중 본사-지사 간 내부 거래 성격이 강한 '단순 송금' 비중이 최근 70%를 돌파했다. 과거처럼 수출 대금이 곧바로 시장에 매물로 나오지 않고, 해외 법인 내부 거래로 묶여있을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이에 대해 권아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해외투자 확대에 따른 해외 현지법인과 내부거래 확대가 영향을 미친 것"이라며 "해외 법인의 사내 유보금 본국 회귀(리패트리에이션) 여부가 원화 강세의 핵심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시장에서는 정부가 지난 2023년 법인세법 개정을 통해 해외 자회사 배당금에 대한 비과세 혜택(익금불산입)을 부여하며 대규모 '자금 리패트리에이션'을 이끌어냈던 사례가 다시 거론되고 있다. 당시 삼성전자 등 주요 기업들이 해외 유보금을 대거 국내로 들여오면서 환율 안정에 기여한 바 있다.

다만 정부는 기업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 가능성에는 일단 선을 긋고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외환시장에서 원화 약세에 대한 일방향적 기대가 있다 보니, 그 부분에 대해 기업들이 잘 살펴달라고 (부총리가) 언급한 것"이라며 "기업에 별도로 자금 송환을 요청하는 계획은 현재로서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min785@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