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로은퇴 시즌3] 노년의 가치와 가격
김경록 옵투스자산운용 고문
대전에 있는 연구원에 강의하러 갔더니 은퇴를 앞둔 박사 연구원들이 있었다. 20년 이상 그 기술 분야를 연구한 베테랑으로 관련 지식이 한껏 쌓여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퇴직하고 재취업을 하면 급여가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에서 김낙수 부장은 상무 승진을 못 하고 퇴직해 중소기업에 자리를 알아보는데 월급이 200만 원이라는 말을 듣는다. 과연 이들의 생산성과 능력이 하루아침에 급하게 변했는가.
퇴직 이후 많은 이들이 마주하는 감정은 '내 가격의 추락'이다. 오랜 시간 쌓아온 경력과 전문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도 아닌데, 시장에서 제시되는 보수는 과거의 절반, 때로는 그 이하로 떨어진다. 사람들은 "내 가치가 떨어졌구나"라고 결론을 내리고 자괴감에 빠진다. 이 판단은 절반만 맞다. 떨어진 것은 '가치'가 아니라 '가격'이며, 그 가격은 개인의 본질적 역량이 아니라 재취업 노동시장의 구조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에서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 그리고 제도적 조건의 함수다. 특히 은퇴 이후 진입하는 재취업 시장은 일반적인 경력 시장과는 다르게 움직인다. 첫째, 기업은 장기적 투자 대상으로서의 인력을 찾기보다 단기적 기능 수행자를 찾는다. 둘째, 조직 내부 승진 체계에 편입되지 않는 외부 인력에 프리미엄을 부여할 유인이 적다. 셋째, 동일 연령대에서 노동 공급이 급증한다. 비슷한 시기에 퇴직한 인력이 한꺼번에 시장에 나오면서 협상력은 급격히 약화한다. 이 3가지 특징으로 인해 개인의 생산성이 완만하게 감소하는 것과는 별개로 노동 가격은 급락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가치는 개인이 창출할 수 있는 실제 능력과 기여도를 의미하는 반면 가격은 시장에서 그 능력에 붙는 교환 비율이다. 가치는 축적의 결과로 천천히 움직이며 급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험과 판단력, 네트워크는 일정 기간 유지되거나 특정 영역에서는 더욱 정교해진다. 그러나 가격은 시장의 협상 구조에 따라 달라진다. 이처럼 은퇴 이후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내 가치의 붕괴가 아니라 가격 결정 메커니즘의 변화다.
그런데도 가격의 하락을 곧바로 가치의 하락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우리가 오랫동안 '연봉=나의 가치'라는 프레임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퇴와 동시에 이 연결 고리는 끊어진다. 문제는 끊어진 연결을 인식하지 못한 채 과거의 기준으로 현재를 해석하려 할 때 발생한다.
은퇴 이후 필요한 것은 자기 가치 하락에 대한 자괴감이 아닌 시장 구조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다. 자신의 가치를 과거의 직위나 연봉으로 환산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어떤 시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가격이 형성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조직 내부에 있을 때는 희소했던 나의 경험이 외부 시장에서는 과잉 공급일 수 있지만 특정 문제 해결 능력이나 네트워크는 적절한 맥락에서는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또한 '금전적인 가격'을 추구하지 않고 '비금전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방법도 있다. 필자의 지인은 의사로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퇴직을 앞두고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에 의과대학을 세워 현지 의사를 양성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는 엄청난 가치를 만들어내지만 비금전적인 일이다. 사회단체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것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노동 가격이 낮아졌다고 해서 진입 자체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초기에는 낮은 가격으로 새로운 시장에 진입하되 이를 자신의 강점이 실제로 수요와 맞닿는 지점을 탐색하는 과정으로 간주하면 된다. 이후에는 단순노동이 아니라 자문, 프로젝트 기반 협업, 교육, 콘텐츠 생산 등 다양한 형태로 가치를 가격에 반영할 수 있다. 이때 가격은 점진적으로 재조정된다.
은퇴 이후의 삶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가격의 내면화'다. 시장이 매긴 숫자를 자신의 가치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은퇴는 나의 가치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나의 노동 가격 체계가 변화하는 것이다. 내가 축적해 온 지식, 경험, 판단력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으며 거래되는 방식과 평가되는 시장이 달라질 뿐이다.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내 가치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진입한 노동 시장의 가격 결정 구조가 달라진 것이다." 이 인식의 전환이야말로 은퇴 이후의 삶을 다시 설계하는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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