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고 키우는 전북, 사라지는 사과…AI 품종개량이 밥상 지킨다

[기후위기 시대, 식량안보 기술]③슈퍼컴·AI로 기후적응 신품종 개발
경북 사과부터 벼·콩까지…디지털 육종으로 지역 생태계·경제 지원

9일 제주시 오등동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 아열대과수 시험 재배지에서 연구원들이 애플망고를 수확하고 있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은 망고의 노동력 절감을 위해 나무 높이를 1.2~1.5m 정도로 낮춰 재배하는 기술을 연구 중이다. (농촌진흥청 제공) 2022.6.9/뉴스1

(세종=뉴스1) 김승준 기자 = 한국의 '국내산 망고' 재배는 이제 제주도를 넘어 전라북도에서도 가능해졌다.

기후 변화는 더 이상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아열대 과일이 한반도 내륙에서 자라기 시작했고, 농업 지형도 점차 달라지고 있다.

오랜 세월 한국인의 식탁을 지탱해 온 주요 작물의 재배지 역시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그 자리를 아열대 작물이 채워가고 있다.

그러나 재배 환경의 변화 속도에 비해 식문화의 변화 속도는 느리다. 소비자들은 기호성 과일에는 비교적 빠르게 적응하지만, 주식 작물의 전환은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생산자도 마찬가지다. 작물을 바꾼다는 것은 단순히 씨앗을 바꾸는 수준이 아니다. 수십 년간 쌓아온 재배 기술과 설비, 거래망을 포기해야 한다. 게다가 북상하는 재배지를 따라 이사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익숙한 땅을 떠나면 이웃 공동체가 해체되고, 지역 경제의 기반도 흔들릴 수 있다.

결국 빨라진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존 작물의 '기후 적응성 강화' 품종 개량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수십 년 걸리는 품종 개량…슈퍼컴·AI가 '디지털 육종'으로 단축

이제 품종 개량의 현장은 밭이 아니라 데이터 속에서 시작되고 있다.

전통적인 품종 개량은 선별과 교배를 반복하며 이뤄진다. 원하는 특성을 지닌 작물끼리 꽃가루를 옮겨 교배를 거듭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속도와 불확실성이다. 교배 결과가 의도대로 이뤄졌는지를 확인하려면, 만들어진 씨앗을 다시 길러야 한다. 성장에 몇 달 걸리는 나물류는 그나마 빠르지만, 열매 맺기까지 수년이 걸리는 과수의 경우 품종 개량에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한다.

또 원하는 특성을 가진 개체가 나오더라도, 그 특성이 다음 세대에 그대로 전달된다는 보장은 없다. 부모의 혈액형이 모두 A형이라도 O형 자녀가 태어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혈액형은 하나의 유전자로 결정되지만, 식물의 주요 형질은 수많은 유전자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예측이 어렵다.

이런 방식으로는 기후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 그래서 '디지털 육종'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에서는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농촌진흥청이 디지털 육종 체계 구축을 주도하고 있다.

디지털 육종은 유전체, 표현형, 환경 정보를 데이터로 전환해 가장 유망한 교배 조합을 찾는 기술이다. 빅데이터 분석과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유전자 조합을 탐색하는 '가상 교배'를 수행함으로써 품종 개량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인다.

농진청은 '작물 유전자원 디지털 데이터베이스', '디지털 표현체 분석 시스템' 등으로 데이터를 수집·관리하고, 초고성능컴퓨터(슈퍼컴퓨터)로 분석하는 체계를 갖췄다. 현재 농진청 슈퍼컴퓨터는 1초에 2900번의 연산을 수행하며, 기존 110개월이 걸리던 고추·콩·벼 등 18개 작목의 전체 특성 분석을 단 2개월 만에 완료했다.

이 같은 인프라를 바탕으로 농진청은 매년 15~20종의 신품종을 선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신동진1' 쌀은 기존 품종보다 병해충 저항성이 높고, 기온 상승에도 품질 저하가 적다. 포도는 고온 환경에서 착색이 어렵지만, 신품종 '젤리팝'은 고온에서도 안정적인 보랏빛 착색이 가능하다.

농촌진흥청 슈퍼컴퓨터 2호기 (농촌진흥청 제공) 2025.10.7 /뉴스1

기술적으로는 디지털 육종보다 더 직접적인 방식인 '유전자 편집'이 대응 속도 면에서는 앞선다. 그러나 소비자 수용성과 국제 규제의 불확실성, 그리고 생태계에 미칠 잠재적 영향이 커서 논란이 많다.

이에 비해 디지털 육종은 기존 교배 방식을 기반으로 AI와 슈퍼컴퓨터로 그 과정을 가속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사회적 수용성이 높다.

아울러 디지털 육종을 위해 축적된 유전체 데이터가 향후 유전자 편집 기술의 기초 인프라로 활용될 수 있다. 디지털 육종은 단기적으로는 현실적인 대안이면서 장기적으로는 차세대 생명공학의 기반이 될 것으로 평가받는다.

4일 경북 포항시 북구 죽장면 일광농원(대표 강창호)에서 농민들이 사과 수확에 한창이다. 2021.11.4/뉴스1 ⓒ News1 최창호 기자
농민 일상 파괴하는 기후변화…디지털 육종으로 지킨다

디지털 육종은 단순히 품종 개발을 가속화하는 기술이 아니라, 농민이 일상을 유지하면서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이다.

경북 지역은 한국의 대표적 사과 주산지로 유명하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재배지 감소와 생산량 저하를 겪고 있다. 사과는 기온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 색과 품질이 결정되는데, 경북의 생육환경은 점차 불리해지고 있다.

농민 입장에서는 수십 년 길러온 사과를 포기하고 다른 작물로 바꾸는 것은 단순한 전환이 아니다. 이는 요식업으로 치면 수십 년 운영한 김치찌개 가게를 횟집으로 전환하는 것과 같은 모험이다.

작물을 바꾸면 수십년간 기르며 쌓은 토양과 날씨에 따른 관리 기술, 마을에 형성된 공동 출하 시스템, 판로 같은 경제적 요소뿐 아니라 과수원에 출근하는 시간, 1년 주기의 생활 리듬 같은 습관도 바꿔야 한다.

강원도로 북상하는 사과 재배적지를 따라 이사하려 해도 이웃 네트워크를 포기해야 하고, 새로운 토양에 적응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 쉽지 않다.

이런 어려움은 지역 차원에서는 지역 경제 위기로 이어지고, 중앙 정부 차원에서는 사과 수급관리 불안정으로 연결된다.

경상북도와 농촌진흥청은 한편으로 대체 작물 재배를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디지털 육종을 활용한 신품종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경상북도농업기술원은 디지털육종, 분자 육종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해 2031년까지 사과, 벼, 콩 등 13개 작물을 대상으로 133개 품종을 개발해 기후변화 대응과 고부가가치 창출을 통한 지역 경제 지원에 나설 계획이다.

궁극적으로 디지털 육종은 단순히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는 기술이 아니라, 지역이 기후변화 속에서도 버틸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인프라다. 농업은 더 이상 한 지역의 생업만이 아니라, 국가 식량안보의 기반이 된다.

seungjun241@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