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꿀 수 없던 양강도 소년, 대학로 무대에 서다[경계를 건넌 사람들]

차위성 '탈북민 배우' 싫지만…"내가 뛸 수 있는 힘"
한국살이 16년, 여전히 이방인…"완벽한 정착은 없는 것 같다"

편집자주 ...경계선을 넘어 새로운 삶에 정착한 이들. 정착 이후에도 크고 작은 경계를 극복해 온 사람들의 삶을 기록합니다. 지리적 경계만이 아니라 문화와 관계의 새로운 세계를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삶 위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몰랐고, 알아야 할 삶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겠습니다.

대학로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차위성 씨. (차 씨 제공)

(서울=뉴스1) 한상희 기자 = "거기서 과연 꿈이라는 걸 꿀 수 있을까요?"

북한에서도 연기나 무대에 관심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배우 차위성 씨(27)는 이렇게 되물었다. 배우를 꿈꿨느냐는 물음부터가 한국 사회에서나 가능한 질문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의 그는 그저 노는 걸 좋아하던 '완전 개구쟁이'였다.

"하루가 정말 단순해요. 해 떨어지면 자고, 일어나면 생계 활동을 해야 하고요. 시골에서 밀수하는 집안에 태어난 제가 평양에 들어가 살겠다, 이런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가 기억하는 북한에서는 농사꾼의 자식은 농사꾼이 되고, 당 간부의 자식은 간부가 됐다. "한 개인이 꿈을 갖고 자기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북한에서는 통제가 안 되는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 소년이 지금 대학로 무대에 선다. 음악극 '금선'에서는 탈북 여성 금선을 사랑하는 억수를 연기했다. 올해 남북하나재단이 제작한 웹드라마 '스타트하나'에서는 대학 창업동아리 회장 오창엽 역을 맡았다.

"다시는 못 돌아올 걸 알았다"…열두 살의 압록강

차 씨의 고향은 양강도 혜산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마주한 곳이다. 국경 지역 주민 상당수가 그렇듯 어머니도 밀수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가 다섯 살 때 어머니는 압록강에서 물에 빠져 숨졌다.

아버지가 먼저 북한을 떠난 뒤 그는 친척 집에서 지내며 연락을 기다렸다. 햇수로 3년째 되던 해, 이제 건너와도 된다는 소식이 닿았다.

2010년 2월, 열두 살이던 그는 얼어붙은 압록강 앞에 섰다. 어머니를 잃은 그 강이었다. 강을 건너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한 장면 한 장면 다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강을 건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국경 경비초소에 돈을 건넨 뒤 경비병들이 다른 초소의 주의를 돌리는 사이 강을 건넜다. 그 순간을 그는 "그냥 쭉 뛰었다"라고 기억한다.

총알이 날아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는 "국경 사람들에게는 그 생활이 워낙 익숙해서 죽음처럼 다가오지는 않는다"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두렵죠. 10억을 줄 테니 내일 다시 해 보라고 하면, 저는 못 해요."

중국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났지만 함께 지낸 날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다. 한국으로 가는 길이 위험해 아버지가 같은 경로를 먼저 밟아본 뒤 아들이 뒤따르기로 했다. 그는 중국 선양에서 6개월 숨어 지낸 뒤 그해 10월 한국에 들어왔다.

"어떻게 대통령한테 그런 말을"…처음 받은 충격

북한에서 배운 남한은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미국놈 앞잡이'였다. 그는 "남쪽은 아직도 못 먹고 못 사니 우리가 빨리 강성대국이 돼서 같은 민족을 도와야 한다고 배웠다"라며 "그때는 그걸 순수한 마음으로 다 받아들였다"라고 했다.

입국 후 단체 버스를 타고 외출하던 날, 당시 이명박 대통령을 향한 거친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대통령이 국가 최고 원수라는 걸 저도 알고 있었거든요. 어떻게 대통령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그것 자체가 너무 충격이었어요."

김정일 정권 시절 북한에서 자란 그에게 지도자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지도자도 우리와 같은 사람일 거라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라고 했다.

"강원도에서 왔어요"…친해질수록 거짓말쟁이가 되는 기분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으로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까까머리에 새까만 피부, 낯선 말투까지. 아버지는 "누가 물어보면 강원도에서 왔다고 하라"라고 일렀다.

출신을 밝히는 일은 지금도 쉽지 않다.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그런 걸로 장난치지 마' 해요. 그때부터 진짜라고 설명해야 하는 과정이 너무 많고, 지쳤죠. 두려움도 맛봤고 상처도 맛봤어요."

그렇다고 말하지 않은 채 가까워지면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다.

"누군가와 친해질 때마다 계속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 같아요."

(배우 차위성 씨 제공)
'탈북민 배우'라는 이름…"보이지 않는 색깔"

'탈북민 배우'로 불리는 게 어떠냐는 질문에는 곧바로 "싫다"라는 답이 나왔다. 그저 배우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그가 내린 결론이다.

"눈, 코, 입 똑같고 피부색도 똑같죠. 그런데 저는 보이지 않는 색깔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 얼굴이 마치 다른 인종인 것처럼 숨길 수가 없는 거예요. 분명 똑같은데, 숨겨지지가 않아요."

그래도 탈북민 관련 배역이 많이 들어왔고, 그 덕분에 실력을 쌓으며 대학로에서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다. 그는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며 "내가 뛸 수 있는 힘"이라고 했다.

"나는 이방인…그래도 필요한 이방인이 될 것"

한국살이 16년. 완전히 정착했다고 느끼느냐는 질문에 그는 "완벽한 정착은 없는 것 같다"라고 답했다.

"저는 항상 이방인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이 사회에 필요한 존재가 되더라도 '필요한 이방인'이 될 뿐이지, 남들과 온전히 똑같아질 수는 절대 없다고요."

그 감각은 인터뷰를 하던 카페에서도 이어졌다.

"지금도 북한 이야기를 하면서 옆 테이블이 듣고 쳐다보면 어떡하지 싶어요. 북한은 아직 단순한 키워드가 아니거든요."

외롭지 않으냐고 묻자 그는 "외롭다"라고 했다.

"외로운데, 숙명이죠. 피부로 느껴질 때는 사실 해결책이 있거든요. 도망을 간다거나요. 그런데 피할 수 없을 때, '맞아, 나는 이방인이야' 하고 그걸 받아들일 때가 제일 외로워요. 존재 자체만으로, 출신만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은 평생 가는 거죠."

무대 위에서라도, 부모님을 다시 만나고 싶다

20대 후반인 그의 꿈은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꿈 앞에서도 걱정이 앞선다.

"귀하게 키운 딸을 탈북민한테 보내실 수 있을까. 저는 부모님도 두 분 다 안 계시고요. 언젠가 입 밖으로 꺼내야 하는 그 순간까지의 스트레스와 피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은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도 간암으로 떠나보냈다.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을 묻자 "부모님을 만나는 판타지극"이라고 답했다. 과거로 돌아가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다시 만나는 배역이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는 "이 사회에 필요한 탈북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통일 비용이 많이 든다', '여기서 태어난 사람들도 먹고살기 힘든데 왜 탈북민한테 퍼 주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고 했다.

"오케이, 내가 진짜 열심히 살아서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될게요."

※뉴스1·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angela0204@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