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평양] '김정은 피규어' 하나 주세요
EBS미디어의 '김정은 종이인형' 논란을 다시 묻다
비난과 맹목으로 굴복시키기보다 건설적 논의 있었으면
- 서재준 기자
(서울=뉴스1) 서재준 기자 = ※주의 : 표준어법에 맞지 않는 용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2015년에 전 세계에서 수입한 피규어를 파는 압구정동의 한 가게에 들렀습니다. 온갖 비싼 '레어템(희귀한 제품)'들이 가득한 가게를 둘러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피규어를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제품은 미국에서 수입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는데, 김 위원장이 '못난 모습'으로 풍자·묘사된 피규어였습니다. 갓난 아기처럼 기저귀를 차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린 나이에 집권한 지도자를 비꼬아서 풍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 가게는 한동안 김 위원장의 피규어 제품을 계속 판매했습니다. 실제 팔렸는지 여부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가게와 사장의 신변에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2003년, 스무 살 무렵에 만난 한 친구는 뉴욕에서 사 온 것이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려진 모자를 쓰고 서울 거리를 활보했습니다. 그 역시 누군가한테 얻어맞거나 욕을 먹진 않았습니다.
최근 EBS의 자회사인 'EBS미디어'에서 김 위원장의 종이 인형을 제작해 상품으로 내놓은 것이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종북이다" "대가리가 깨졌냐" 등의 비난이 제기됐습니다. "독재자를 미화하는 것이다" 정도의 주장은 아주 건전한 비판이었죠.
문제가 된 것은 제품에 명시된 '세계 최연소 국가 원수', '한반도 평화 시대를 여는 지도자들'이라는 표현과, 이 제품이 '뜯어 만드는 세상으로 배우는 지식세상'이라는 교육 도구로 출시됐다는 점입니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최연소 국가 원수'라는 표현을 마치 김 위원장의 능력을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100% '아니다'라는 반론을 펼치진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문장 자체로는 '건조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세계 최연소 지도자인지 사실 확인을 제대로 했는지는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교육 도구로서 이런 제품을 출시한 것은 EBS미디어의 신중하지 못한 처사라는 비판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번 처사가 "대가리가 깨지"거나 종북으로 매도될 수준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EBS미디어의 대표 이사는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사퇴했습니다.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2003년 김정일 모자와 2015년의 김정은 피규어를 봤을 때 저도 움찔했음을 고백합니다. 그걸 누군가는 '레드 콤플렉스'라고 규정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내재된 한국사회의 '빨갱이'라는 개념에 대한 공포가 작용했던 것이겠죠.
저보다 '레드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이제 막 스물다섯을 넘긴, 저보다 10살이 어린 세 명의 답변은 의외였습니다. 세 명 모두 "그런 이슈가 있는지 몰랐다"라고 답한 뒤 "김정은 피규어가 있든 말든 나와 상관도 없고 불편하지도 않다"라는 의견을 모은 것입니다.
세 명이라는 숫자로 어떤 기준을 세우기는 어렵지만, 이것이 누군가의 사표를 받아내고, 사과문을 받아내야 할 일인지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라는 제 나름의 확신은 섰습니다.
동시에 '이니 굿즈(문재인 대통령 관련 상품)'은 되고 '으니 굿즈(김정은 국무위원장 관련 상품)'은 왜 안되는지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도 생겼습니다. 그것은 이 문제에 대해 합리적인 비판의 목소리를 아직 접하지 못한 탓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니 굿즈'가 누군가에게는 '완소'이거나 '극혐'의 대상이듯 '으니 굿즈'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게 제가 본 현재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다시 그 세명에게 물었습니다. "김정은 피규어를 살 의사가 있느냐"라고. "재밌으니까 한번 사본다"와 "돈 아깝게 굳이 왜 사"와 "여전히 관심이 없다"라는 답변으로 나뉘었습니다. 어떤 답변도 작금의 치열한 찬반 논란과 연결이 되는 것 같진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 답변들이 왠지 좋았습니다. '리버럴'이라는 표현을 쓰진 않겠지만, 제가 겪었던 내적 충돌에 비하면 조금 더 나아 보였습니다. EBS미디어 대표이사의 사퇴와 인디 가수의 사과문을 보면서, 혹시 우리가 너무 빠르게 변하는 남북관계 속에서 어떤 내적 충돌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됐습니다.
저에게도 다시 셀프 질문을 던진 뒤 역시 제멋대로 장문의 답을 적었습니다. 쓰고 보니 중언부언에 정말 자신감 없어 보이는 답입니다만, 이렇습니다.
"내 안에 미세하게 남은 '레드 콤플렉스'가 깨질 수도 있을지 혹시 몰라 일단 한번 사 본다."
seojib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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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북한의 수도인 평양은 서울에서 약 200km가량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차로 달리면 3시간가량이면 도달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지만 이념의 차이는 선명한 공간의 단절도 남겼습니다.
공존하지만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평양의 일상생활부터 지도부의 숨겨진 모습까지 북한의 이모저모를 전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