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 단골 질문 '주적' 논쟁이 던지는 과제[한반도 GPS]
'주적' 한 글자에 담긴 안보관 논란…정부는 '적'·'위협' 표기 병행
'적대적 두 국가' 노골화하는 北…정책 논리와 안보 의지 균형 고민해야
- 김예원 기자
(서울=뉴스1) 김예원 기자 = 군 관련 인사청문회가 열릴 때마다 여야를 막론하고 등장하는 단골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북한은 우리의 주적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주'(主) 한 글자에 따라 청문회장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기도, 달아오르기도 합니다. 지난주 열린 강신철 국방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강 후보자는 북한 정권과 북한군을 '주적'이 아닌 '적'으로만 일관되게 표현했습니다. 2004년 국방 백서 이후 공식 문서에서 '주적' 표기가 삭제됐다는 점, '주적' 개념이 부활할 경우 주요 위협이 아닌 적은 무엇인가 하는 논리적 허점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들었습니다. 북한이 주적은 아니라도 우리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대상이 맞냐는 질의엔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최고의 위협은 맞지만 주적은 아니라는 설명. 얼핏 보면 모순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학술적 관점에선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적'(enemy)은 명확한 적대 의도 및 공격력을 보유하고 있어 지금 당장 우리가 무력화해야 하는 실체에 가깝다면, '위협'(threat)은 피해나 손실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어 능동적으로 관리·억제해야 하는 복합적인 안보 환경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0년대 초 이후 '주적'이라는 말이 공식 문서에서 사라진 것도 사실과 부합합니다. 북한을 '주적'으로 처음 명시한 건 1995년 국방백서였습니다. 1994년 김영삼 정부 때 남북 실무접촉에서 북한이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주적'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국방백서에선 '직접적 군사 위협' 등으로 대체됐지만, 2010년 천안함 피격·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부 백서에선 '적'으로 재등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문재인 정부 집권기엔 북한을 직접 지목하는 대신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적의 범주를 넓혀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2022년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적'은 다시 북한을 명확히 가리키는 표기로 회귀했습니다.
이르면 올해 말 발간될 예정인 이재명 정부의 첫 국방 백서가 북한 정권과 북한군을 어떻게 규정할지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입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지난 8월 진행된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평화공존을 추구하면서 주적이라고 하는 건 옳지 않다"라며 "노무현·문재인 정부의 '위협'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다만 국방부는 "새 국방 백서에서 '북한을 적'이라고 규정하지 않는 방향을 검토하는 건 사실이 아니다"라며 "북한 정권과 북한군이 우리의 적이라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밝혀 부처 간 온도 차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그간의 흐름을 종합해 보면, 진보·보수 정권을 막론하고 '주적' 표기는 다소 자제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엔 국제 정세 및 대한민국의 외교적 입지를 고려한 여러 이유가 존재합니다. 그중 하나는 정 장관의 말처럼 '주적' 표기가 헌법의 '평화적 통일 정책 추진'이라는 국가적 의무와 충돌할 여지가 크기 때문입니다. 북한을 '주적'이라 공식 규정할 경우 향후 남북 대화나 협상,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외교적 행위 자체가 모순에 빠지고 스스로의 입지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안보 지형의 변화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은 북한의 고도화된 핵·미사일 위협뿐만 아니라 북·중·러 밀착,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안보 지형 변화 등 복잡한 상황에 동시다발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지구 반대편 호르무즈 해협의 군사적 충돌이 주한미군 역할 조정과 파병 압박으로 번지며 한반도를 위협하는 세상입니다. 적의 우선순위만 단선적으로 규정하는 방식은 정부의 외교·안보적 판단을 경직시킬 위험이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사청문회 때마다 반복되는 이 질문을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나 일회성 정치 공세로만 치부하기는 어렵습니다. '주적' 논란이 후보자의 다른 신상 의혹만큼이나 큰 주목을 받았다는 점은, 그만큼 오늘날 국민이 체감하는 북한의 모습이 '적 중의 적'에 가깝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북한을 위협적인 세력으로 바라보는 국민적 여론은 갈수록 커지는 추세입니다.
북한 역시 한국을 함께 통일해야 할 '한민족'이 아닌, 대립 관계의 '교전 상대'로 바라보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수도권을 겨냥한 대남 도발이 빈번해진 것은 물론, 군사분계선(MDL) 일대의 '국경선화' 작업도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최근 당 규약에서 '남조선'과 '평화통일' 표기를 삭제하는 등 '적대적 두 국가' 노선을 한층 강화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대국민 설문조사에서 통일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비율이 점점 줄고 북한을 경계·적대 대상으로 인식하는 여론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최근엔 전방 부대에서 불거진 '삼단봉 근무', '빈총 경계' 논란 등 우리 군의 기본적 안보 태세에 의구심을 갖게 하는 사건들도 잇따랐습니다. 군의 기강 해이와 안보관에 대한 우려가 누적된 상황에서, 국민이 4성 장군 출신인 강 후보자에게 기대했던 모습은 정책·행정상의 논리적 정교함보단 국민에게 안도감을 주는 굳건한 대비 태세의 표상이었을 듯합니다.
어떤 도발에도 단호히 대응할 것이라는 굳건한 기세와 태도는 때로 정교한 논리보다 강력합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 국방 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적군 사살 수 같은 객관적 데이터에만 매몰돼 장병들의 수행 의지나 국민들의 반전 여론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을 간과했고, 이는 패배에 영향을 줬음을 고백한 바 있습니다.
문재인·이재명 정부의 국방 수장인 송영무, 안규백 장관이 백서 표기와는 별개로 청문회 자리에서 북한을 향해 명백히 "주적"이라 칭한 것은 이런 '기세의 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50만 국군을 이끄는 국방 수장에게 있어 논리적 정교함은 매우 중요한 덕목입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국민에게 확고한 안도감을 주는 단호한 태도 역시 주요한 자질 중 하나입니다. '정책의 언어'와 '선명한 안보 의지'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주적'이라는 한 글자가 차기 국방 수장에게 던지는 무거운 숙제입니다.
kimyew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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