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전 전우 앞에 선 호국영웅…전장 떠나지 못한 노병의 이야기[르포]
함흥 출신 참전용사 한희나 옹…육군에 회고록·전쟁수기 기증
평창·인제 일대서 전투…전장서 '유일한 자산' 학생증 찢은 후일담도 전해
- 김기성 기자
(계룡=뉴스1) 김기성 기자 = 구순을 넘긴 백발 노병은 75년 전 자신의 곁에서 전사한 전우의 이름 앞에서 말없이 눈을 감고 한참을 섰다. 지팡이 없이는 한 걸음조차 떼기 버거워 보이던 노병이 휠체어에서 일어나 비장한 눈으로 전우의 이름 앞에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전우의 이름을 한참 매만지던 손끝이 떨리자 눈가는 촉촉이 젖어 들었다.
6·25전쟁 참전용사 한희나 옹(96)은 지난 22일 충남 계룡대 육군본부 '명예의 전당'을 방문해 자신과 함께 고지를 지키다 전사한 고(故) 김병칠 이등상사를 떠올렸다. 그는 김 이등상사가 "언제나 부하들을 생각하고 사랑했고, 부하들은 그를 존경으로 맞았다. 용감한 사람이었다"라고 회상했다.
한 옹은 오래 전 한국전쟁을 회고하며 작성한 자필 수기를 비롯한 기록물 총 3점과 자신의 회고록 '전장에 두고 온 학생증'을 육군 기록정보관리단(기정단)에 기증하기로 했다. 이번 자리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됐다.
22일 오전 9시 30분쯤 참전영웅 제복을 입고 한 손에 지팡이를 짚은 채 기정단 청사를 찾은 한 옹은 취재진과 기정단 관계자들에게 먼저 머리 숙여 인사했다.
그는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주용선 육군기록정보관리단장의 기관 설명을 들었다. 한 옹은 기정단 로비에 전시된 육군 제6사단의 한국전쟁 당시 지휘소 이동 지도를 보고 자신이 속했던 수도사단의 이동 경로 등을 물으며 75년 전 몸 바쳤던 전장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한 옹은 회고록을 쓴 이유에 대해 "죽을 운명인데 기적적으로 몇 번이나 살아남았다. 여러 번 죽을 각오를 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서 "내가 죽은 후에도 후대가 이 책을 보고 국가를 위해 용기를 내 싸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책을 쓰자는 생각을 했다"라고 결연하게 말했다.
1930년 함경북도 함흥에서 태어난 한 옹은 흥남공업대학교 1학년 재학 중 한국전쟁을 맞았다. 그는 중공군의 개입이 본격화한 1950년 11월 월남하기로 다짐하고 대학 성적표와 학생증만 챙겼다. 흥남 부두를 출발해 강원도 묵호(동해)에 내린 한 옹은 국군에 입대해 군사교육을 받고 1951년 2월 수도사단(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1기갑연대 수색 중대와 함께 전장에 투입됐다.
당시는 1951년 1월 북한군과 중공군이 서울을 다시 빼앗고(1·4 후퇴) 4차 공세를 감행하던 시점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선더볼트 작전'과 '킬러 작전'을 펼쳐 공세를 막아내고 서울 재탈환을 목전에 뒀을 때다.
한 옹이 일선에 배치될 무렵 수도사단은 동부전선 오대산, 발왕산에 있는 인민군을 몰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강원도 평창군 일대에서 발생한 '하진부리-속사리 전투'가 그것이다.
전투 당시 상황을 설명해달라는 부탁에 한 옹의 목소리엔 힘이 바짝 들어갔다. 마치 전장에서 막 돌아온 용사처럼 급한 손짓을 곁들이며 그는 말을 이어갔다.
한 옹은 "미군 고문관과 우리 부대 연대장이 전방의 고지와 하늘을 보면서 뭐라 이야기를 하니 비행기가 한 대가 날아와 그 산 위를 빙빙 돌았다. 이내 전투기 2대가 와서 폭탄을 떨어뜨리고 갔다"면서 "폭격하고, 포를 쏘고, 기관총을 쏘고 우리 군이 산봉우리로 진격해 소총을 쏘면서 고지를 점령했다. 멋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전투 당시 한 옹이 속한 수색 중대는 인민군에게 포위당하고 퇴로까지 차단돼 위태로운 상황을 겪기도 했다. 그는 전투 당시 인민군의 포위를 뚫기 위해 변장하는 과정에서 고향을 떠나오며 챙겼던 유일한 소지품인 '학생증'을 전장에 버렸다고 했다.
한 옹은 "학생증을 가지고 온 것은 자유주의 사회에서 대학에 다니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죽은 후 국군이 학생증을 찾으면 나를 인민군으로 오해할 수도 있고, 정작 내가 그때 입은 바지는 국군 것이니 인민군에게도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학생증을 찢어서 버렸다"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한 옹이 속한 수도사단은 1951년 4월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춘계공세(제5차 공세)를 막아내면서 전선을 양양, 속초, 간성까지 끌어올린 후 설악산 일대 인민군을 몰아내는 작전에 투입됐다.
인민군은 강원도 인제군 서화리부터 산머리곡산(산두곡산), 향로봉에 이르기까지 방어선을 구축하고 중서부전선 병력의 후퇴를 지원하고 있었다.
한 옹이 속한 수색 중대는 1951년 6월 산두곡산과 향로봉 사이 무명 1079고지 일대를 방어하던 중 인민군의 기습을 받았다.
그는 "비가 많이 와서 보초들이 불을 붙이려 썩은 나무를 줍는 과정에서 인민군이 '만세'를 외치며 습격했다. 겨우 6~7명이 무명고지로 올라가 지키게 됐다"면서 "전우들이 하나둘 사라지더니 결국엔 나와 김 이등상사, 중대장 셋만 남았는데 수류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오른쪽으로 총을 쏘면서 왼쪽에 있던 김 이등상사를 불렀는데 대답이 없었다. 왼손을 뻗으니 그의 손이 부딪혔고, 분명 따뜻했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그가 땅에 코를 박고 죽었더라"라고 말했다.
한 옹이 김 이등상사의 전사 사실을 중대장에게 알리자 그제야 후퇴가 시작됐다고 한다. 하지만 한 옹은 1951년 6월 6일 인민군에 의해 붙잡혀 전쟁포로가 됐다.
기증품 중 원고지 뒷장에 손으로 직접 그린 약도가 기자의 눈길을 끌었다. 이날 행사에 동석한 한 옹의 아들에게 설명을 부탁하자 묘한 장면이 연출됐다. 아들이 원고지를 뒤집어 약도 설명을 아버지에게 요청하자 한 옹이 급히 원고지를 다시 뒤집은 것이다.
한 옹은 "내가 (가족 중) 제일 막내인데, 이북에선 (내가 월남한 것 때문에) '삼족 멸족'이라고들 말한다. 혹시나 북한에서 조카나 남은 가족들을 붙잡을 수도 있으니까 제일 걱정된다"라고 조용히 말했다. 이북에 남은 가족들의 정보가 알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여전한 것이다.
이어 "가족 생각이 나면 '잊어야 한다, 억제해야 한다'라고 생각은 했지만 기억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언제나 가족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면서 "전쟁 중에 과수원 인근에 주둔할 때 밤에 자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다. 우리 집이 과수원을 했었다. 꿈에 가족이 나와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때는 몰랐다. 남과 북이 이렇게 오랫동안 전쟁을 하고 끝내는 다시 오갈 수 없게 될 줄은. 그것이 어머니와의 평생 마지막 인사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육군은 "오늘 누리는 자유와 번영, 민주주의의 바탕에는 이름조차 불리지 못하는 호국영령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고, 대한민국이 더없이 어려웠던 시절 육군은 국민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무거운 희생을 감당했다"면서 "육군은 국민의 평범한 일상을 지켜온 가치와 선배 전우들의 헌신을 기억하고 계승해 국민을 지키는 본연의 임무를 다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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