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호 피격' 후 호르무즈 풀어 준 이란…'위기 탈출' 시도?

나무호 공격 '주체'로 몰린 이란의 '통항 허가' 두고 해석 분분
공격 주체 인정 없이 '호르무즈 통항'으로 외교적 돌파구 마련 가능성

오만 무산담 인근 호르무즈 해협에서 15일(현지시간) 선박들이 항해하고 있다. 2026.05.16. ⓒ 로이터=뉴스1

(서울=뉴스1) 임여익 기자 = 호르무즈 해협에 두 달 넘게 고립됐던 한국 선박 한 척이 이란 정부와의 협의 아래 20일 오후 해협을 통과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 이후 장기간 해협을 봉쇄해 온 이란이 한국 선박의 통항을 허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란 측이 갑자기 통항 허가를 한 배경에는 최근 발생한 'HMM 나무'호 피격 사건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여러 정황상 이란이 나무호를 공격한 주체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자, 이란이 표면적으로는 공격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한국과의 외교적 협상 차원에서 우리 선박의 탈출을 승인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교부와 선박 정보 제공 어플리케이션인 '마린 트래픽' 등에 따르면, 지난 18일(한국시간) 밤 이란 측은 HMM의 '유니버설 위너'(UNIVERSAL WINNER)호의 호르무즈 해협 통항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주이란한국대사관을 통해 전달했다. 정부는 선사에 이란 측의 입장을 전달했고, 협의를 통해 유니버설 위너호는 이튿날 새벽 카타르 인근 해역에서 한국을 향한 운항을 개시했다.

유니버셜 위너호는 현재 이란이 제시한 항로를 따라 안전 지역인 오만만으로 향하고 있다. 다음 달 8일 울산항에 들어올 것으로 예상된다.

외교부 당국자는 해당 선박의 통항과 관련해 "이란 측과의 조율이 있었다"면서 "(운항 개시 이후에도) 선박의 안전을 위해 (이란·미국을 포함한) 유관국들과의 소통이 이뤄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공습을 시작한 이후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사실상 전면 통제해 왔다. 이 과정에서 이란 정부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는 자체적으로 해협에서 지정 항로를 운영하며 다른 나라 선박들에게 통행료를 걷는 방안을 추진했다. 일부 선박은 최대 200만 달러(약 30억 원)의 통행료를 요구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해협을 통과 중인 우리 선박은 어떠한 명목의 비용도 이란 측에 내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韓 유조선, 이란에 통행료 안 냈다…'나무호 사건' 이후 태도 바뀐 이란 정부
지난 4일 '미상 비행체' 2기의 타격으로 피해를 입은 한국 선박 나무호 내부의 모습. (외교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6.5.11 ⓒ 뉴스1

이란 측이 갑자기 한국 선박에 대한 통항을 허가하고 꾸준히 요구해 오던 통행료를 받지 않은 배경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우선 정부는 그간 한국이 이란과의 외교적 관계를 위해 들여온 노력의 결과라는 입장이다.

우리 정부는 지난달 정병하 외교장관 특사를 약 2주 동안 현지에 파견하며 적극적인 대(對)이란 외교를 진행했다. 조현 외교부 장관도 전쟁 발발 이후 아바스 아라그치 외교장관과 수차례 통화하며 양국 간 입장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등 활발하게 소통했다.

하지만 이같은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란은 지속적으로 통행료 등을 요구하거나, 고립된 우리 선박의 운항을 허가하진 않았다.

그랬던 이란이 통행료 없이 우리 국적 선박의 운항 재개를 승인하는 등 전격적으로 태도를 바꾼 데는 다른 '전략적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이달 초 발생한 나무호 피격 사건의 공격 주체가 점차 이란 쪽으로 좁혀지는 분위기에서 이뤄진 결정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나무호의 공격 주체로 이란을 명확하게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정황상 이란 측 소행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상황이다. 외교 당국과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혁명수비대(IRGC) 등의 소행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14일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기자간담회에서 "이란 외에 다른 어떤 주체에 의한 공격 가능성은 아직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공격 주체 특정에 속도내자…이란, '출구 찾기' 나섰나
사이드 쿠제치 주한 이란 대사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를 나서는 모습 2026.5.10 ⓒ 뉴스1 임세영 기자

이란은 나무호 피격 사건 이후 줄곧 '혐의'를 부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란은 과거 호르무즈 해협 일대에서 중국, 태국, 프랑스 소속 선박이 공격당했을 때도 '이란 연루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에스마일 바가이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지난 18일 기자회견에서 '가짜 깃발'이라는 개념을 언급하며 이번 사건이 이란을 모함하기 위한 어떤 세력의 공작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가짜 깃발 공작'은 특정 세력이 자신의 소속을 숨기고 공격이나 테러를 감행한 뒤, 이를 적대국이나 제3자가 공격한 것처럼 조작하는 기만전술을 의미한다.

정부는 외교부 고위 당국자를 통해 공격 주체가 확인되는 대로 "응분의 외교적 공세"를 가하겠다는 메시지를 내면서 공격 주체 특정을 위한 조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나무호를 타격한 비행체의 잔해는 지난 15일부터 국내에서 국방부 산하 국방과학연구소(ADD) 전문가를 중심으로 정밀 분석 중이다. 정부는 또 나무호가 있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10여 명 규모의 기술분석팀을 보내 추가 정밀 조사도 진행했다.

이란 입장에서는 한국에 대한 '외교적 제스처'를 던지지 않는다면 공격 주체가 자신들로 특정되는 것이 '시간 문제'라는 압박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나무호 사건의 소행을 인정하는 것은 군사·외교적으로 리스크가 큰 만큼, 호르무즈 해협에 고립된 우리 선박과 선원들의 탈출을 보장하는 쪽으로 협상을 제안했을 수 있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지역연구센터장은 "한국 선박에 대한 이란의 통항 허가가 나무호 피격 사건과 확실히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란 혁명수비대의 공격 가능성이 매우 자명한 상황에서 이란 정부가 공격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내부적으로는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짚었다.

이어 장 센터장은 "이란 정부가 혁명수비대 측에 강력히 항의하는 한편 한국을 향해서는 선박 한 척에 대한 무사한 통과를 보장해 준 것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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