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추진 잠수함, 한미동맹 새 시대를 열다 [전문가 칼럼]

김진홍 전 공군 방공유도탄사령관(호서대 국방융복합기술연구소 부소장)

김진홍 전 공군 방공유도탄사령관(호서대 국방융복합기술연구소 부소장)

지난 10월 말 경주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를 계기로 이뤄진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미 안보협력의 중대한 전환점이 이뤄졌다.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SSN) 요청에 트럼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한국이 현재 보유한 구식이고 기동성이 떨어지는 디젤 잠수함 대신 원자력 잠수함을 건조하도록 승인했다"고 밝히면서 한국도 이제 핵추진 잠수함을 보유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동안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개발은 기술적으로는 이미 충분한 역량이 있었지만,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비확산 원칙이 발목을 잡았다.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보수·진보 정부와 상관없이 여러 차례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외교적 제약 앞에 실패했다.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한국 핵추진 잠수함 건조 승인은 단순한 기술 허용이 아니다. 한국과 미국의 강력한 군사 동맹을 재확인하면서, 지금까지 수십년간 번번이 논의에서 배제된 핵추진 잠수함을 통해 한국이 이제 핵추진 잠수함의 전략적 억제 시대로 들어간다는 신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월 29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백악관 공식 사진, 재판매 및 DB금지)
핵추진 잠수함 승인, 한미 동맹의 새로운 기회

그동안 한국 해군의 전략은 방어와 감시에 치우쳐 있었다. 디젤 잠수함은 은밀하지만 작전 지속력이 짧고, 작전 해역도 제한된다. 그러나 핵추진 잠수함은 수 주일이 아닌 수개월 동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고 작전할 수 있다. 북한의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이나 중국의 원양해군 활동에 대해 한국이 더 깊은 수역에서 먼저 탐지하고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한다는 뜻이다. 핵추진 잠수함은 단순한 함정이 아니라 적에게 보이지 않는 전략적 억제력을 가하는 존재라는 공포가 바로 핵추진 잠수함의 본질적 가치다.

그동안 미국은 핵추진 잠수함 기술을 영국, 호주 등 극소수 동맹국에만 공유했다. 그런 미국이 한국에 문을 연 것은, 한국이 이미 신뢰할 만한 전략 파트너로 성장했다는 상징적 선언이다. 한미가 공동으로 추진할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무기 협력이 아니라 미래 해양 전략 파트너로서 한국의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현실적 필요가 반영돼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 해양 패권 경쟁은 치열해지고 있다. 중국은 이미 10척 이상의 핵추진 잠수함을 운영하며 남중국해를 넘어 서태평양까지 작전 반경을 넓히고 있다. 일본도 잠수함 전력을 꾸준히 확충하며, 사실상 핵추진 잠수함 개발 역량을 비축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보유는 뒤처진 균형을 되돌리는 일이다.

세부 기술과 비확산 숙제, 슬기롭게 헤쳐가야

특히 북한의 전술핵 탑재 SLBM 위협이 고도화하는 지금, 한국이 수중 탐지망을 확장하지 않는다면 억제력의 균형은 깨질 수밖에 없다. 핵추진 잠수함은 그 불균형을 바로잡는 전략적 억제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앞으로 핵추진 잠수함을 둘러싼 과제도 만만치 않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화오션이 인수한 필라델피아 필리조선소에서 건조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이미 최고 수준의 조선 설비와 인력을 보유한 상황에서 전 세계 최상위권 원전 5대 강국의 이점을 살려 핵추진 잠수함 건조 역량을 단계적으로 확보할 여건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향후 원자로 설계, 방사능 차폐, 승조원 안전 관리 등은 최고 수준의 기술과 제도를 요구함을 감안해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해 보인다.

또한 국제 비확산 체제(NPT) 내에서 핵연료 사용에 대한 투명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것은 기술적 난관이지 정치적 금기가 아니다. 호주가 AUKUS 체제를 통해 유사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듯, 한국 역시 한미 공조 체계 아래 투명한 비확산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면 오히려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다.

미국 해군 버지니아급 핵잠수함 '버몬트함'(SSN-792·7800톤). /뉴스1 ⓒ News1 윤일지 기자
한미동맹의 '수평적 전환', 군사 강국 시작점으로

핵추진 잠수함 프로젝트는 수많은 연관 산업을 동반한다. 원자로, 정밀기계, 수중음향, 합금소재 등 수백 개의 고부가가치 산업이 참여한다. 한국이 조선과 원전 기술의 강점을 결합한다면 방위산업에서 핵추진 함정 분야의 글로벌 공급망 주도권을 확보할 가능성도 있다. 이는 단순히 군사력 증강이 아니라 새로운 산업적 르네상스다. 한 척의 핵잠수함이 국가 기술력의 집약체라면, 그 건조 과정은 곧 기술주권의 상징이다.

이번 핵추진 잠수함 승인 논의의 진짜 의미는 한미 관계의 새로운 변화를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한미 안보협력이 보호 중심의 방위체제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공동 억제와 상호 책임을 기반으로 한 수평적 동맹 관계로 옮겨가고 있다. 핵추진 잠수함은 단순한 군사력 강화 조치를 넘어 한미동맹의 전략적 지형을 새롭게 재편하는 중대한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이 미국과 함께 인도·태평양 안보를 떠받치는 동등한 축으로 올라선다는 상징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한국은 미국의 소중한 친구이자 동맹"이란 발언에는 이런 인식 변화가 깔려 있다.

전 세계 안보 지형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 중국은 서해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고, 그 가운데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 21세기 동북아의 안보 판도가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핵추진 잠수함은 한반도 안보의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점이다. 자주적 전략 해군력을 확보할 수 있는 이번 경주 회담이 드디어 핵추진 잠수함 시대의 문을 연 것이다.

opinio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