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한국인 구금' 사태를 보는 교육자의 시각 [이재영 칼럼]
이재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이재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에서 발생한 한국 노동자 구금 사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다행히 빨리 해결돼 모든 노동자가 무사히 귀국했지만, 그분들이 겪은 심신의 고통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동맹으로 신뢰하는 미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점이 놀랍고, 미국의 이익을 위해 막대한 규모로 투자하면서 그런 대접을 받았다는 점은 개탄스럽다.
이 사태에서 주목되는 건 회생 불가능하게 몰락한 미국 제조업의 현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리쇼어링을 외치면서 관세까지 동원했지만, 기반이 붕괴한 미국 제조업의 회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치솟은 인건비와 생산 원가, 무너진 공급망으로 인해 공장을 운영하기도 어렵지만, 힘겹게 공장을 유지해도 제대로 일할 숙련된 노동자를 찾을 수 없다. 특히 반도체나 배터리처럼 적정 수율 유지가 어려운 분야는 이 문제가 심각하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파운드리 기업인 타이완의 TSMC도 미국 공장에서는 적자를 감수하고 있다.
삼성전자, 현대차, SK하이닉스, LG에너지솔루션 등 미국 투자와 현지 생산을 늘리는 기업 대부분이 숙련된 노동력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는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한국에서 인력을 데려갔는데, 미국이 자기들끼리도 손발이 맞지 않아 이런 사태를 만드니 난감하다. 뒤늦게 심각성을 깨달은 트럼프 대통령이 반도체, 배터리, 조선 등 분야는 한국 전문가에게 미국 노동자 교육을 맡기겠다고 수습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한국인의 불쾌함과 불안감이 가시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에 미국 조선을 살리겠다는 '마스가(MASGA) 프로젝트'인들 제대로 추진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제조업 자립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생태계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는다. 미국과 유럽의 제조업이 오래전에 무너졌고 중국이 막대한 물량을 쏟아내는 제조업 강국으로 도약한 상황에서, 한국은 독자적 제조업 역량과 생태계를 유지하는 희귀한 나라다. 자동차, 반도체, 배터리, 조선, 스마트폰에 원전 건설과 방산까지 거의 모든 제조업을 다 잘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기술 교육에 대한 꾸준한 투자, 중장기적 인력 양성 전략, 미래를 내다보는 제조업 육성책이 함께 어우러진 결과다.
그러나 걱정스럽게 한국 제조업에도 이미 적신호가 켜졌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제조업 생태계를 이끌어갈 유능한 인력이 새롭게 충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재들은 이공계를 외면하며 의·치·약학계에 몰리고, 제조업 생태계를 떠받치는 중견 및 중소기업은 젊은 인력을 구하지 못한다. 제조업 현장은 고령화가 심해져서 현직 노동자들이 은퇴하면 지금 미국처럼 숙련된 노동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될 것이다.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들어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청년 세대의 이공계와 제조업 기피도 주요한 원인이다.
그렇다고 청년 세대를 탓할 수는 없다. 저임금에 위험한 작업 환경과 불안한 처우를 감수하고 희생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산업구조 고도화와 사회의 눈높이 향상에 발맞춰 기업의 태도도 변해야 하고, 제조업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에 공헌하는 만큼 실질적으로 보상받는 일로 인식돼야 한다. 제조업 생태계는 한번 무너지면 회복할 수 없다는 걸 미국의 사례를 통해 확인했는데, 제조업을 꺼리게 만드는 환경을 그대로 둔 채 해외 인력 수용으로 이 문제를 미봉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 된다.
이와 함께 다시금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게 교육의 중요성이다. 한국에서 고등교육은 산업 진흥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고, 튼튼한 제조업 생태계가 갖춰진 것도 교육의 역할 덕분이었다. 특히 첨단기술 발전으로 사회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고등교육은 미래의 변화를 잘 읽어내고 인력이 사회 각 분야로 적절하게 분산 배치되도록 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우수한 인적자원을 양성하는 데 고등교육의 역동성과 창발성이 중요하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근래 교육이 그런 역할을 못 하는 사례가 많다. 정치적 풍향이 변한다고 교육이 갈대처럼 흔들리는 일을 자주 보게 된다. 세상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유행에 따라 단기적 성과를 좇아 과도하게 쏠리는 일도 드물지 않다. 코딩 교육 열풍이 대표적인 사례이고, 융합 교육이나 AI 교육 열풍도 그럴 조짐이 보인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모든 국민이 코딩을 배워야 한다"면서 대학생에게 의무로 코딩을 배우게 하자는 주장이 득세하고 그걸 실제로 시도한 대학도 있으나, 생성형 인공지능(AI) 등장 이후 그런 열기는 거의 사라졌다.
결국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기본을 지키는 것임을 한 번 더 확인하게 된다. 제조업 생태계를 튼튼하게 유지하는 것도 이공계 교육의 기본을 다지는 데서 시작한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건 이리저리 유행을 좇는 게 아니라 이공계 교육의 기본을 다지면서 멀리 보는 안목을 바탕으로 교육과 산업 생태계를 재설계하는 것이다.
초·중등교육부터 대학교육, 직업교육, 산업 현장, 평생학습으로 이어지는 전주기적 인재 양성 체계를 구축하고 반도체, 바이오, 신재생에너지, AI 등 첨단 분야와 전통적 제조업 분야에 사회 역량이 고르게 축적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메커니즘을 만들어야 한다.
미국 제조업의 현실은 남의 일만은 아니다. 제조업이라는 토대가 흔들리니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가 형편없는 민낯을 드러냈다. 조지아주 한국인 노동자 구금 사태는 충격적일지라도 잠시 지나가는 바람일 수 있으나, 그것이 우리에게 남긴 생각할 거리는 간단치 않다. 교육이 국가 백년대계라면 지금부터라도 정말로 미래 100년을 내다보는 계획을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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