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유의 한국인 300여명 구금 사태…美 문제 삼은 '비자' 현황 살펴보니
적정 비자 발급에 수개월 걸려…'단기 상용·ESTA 입국' 관행 의존
전문가 "美, 대미 투자 압박하지만…제도는 현실 반영 못 하는 엇박자"
- 노민호 기자, 정윤영 기자
(서울=뉴스1) 노민호 정윤영 기자 = 강경한 이민 정책을 펼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조지아주 내 현대자동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의 한국인 직원 300여 명을 기습 단속·구금한 사태의 파장이 6일에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토안보수사국(HSI) 등은 지난 4일(현지시간) 현장을 급습했으며, 475명을 체포했다. 이들 중 한국인은 300여 명에 이른다. 미국은 이들이 받은 비자가 실제 이들이 현지에서 한 활동과 맞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단속을 단행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국은 영구 이주 목적의 비자와 관광, 사업 유학 등에 필요한 '비이민 비자'를 구분해 발급하고 있다. 한국 등 비자 면제 프로그램(VWP)에 가입된 40개국에 대해선 최대 90일간 단기 관광 및 출장 시 비자 신청을 면제해 주는 전자여행허가(ESTA)를 발급하고 있다. ESTA는 공식적으로 '비자'는 아니다.
이번에 미 당국에 체포된 한국인 대부분은 ESTA나 비이민 비자 중 하나인 '단기 상용'(B-1) 비자를 받고 미국에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B-1 비자를 받으면 최대 6개월간 비즈니스 회의나 계약, 시장 조사 등의 활동이 가능하다. 급여를 받는 현장에서의 직접 노동·설치·시공 등 행위는 엄격히 금지된다. ESTA 역시 B-1과 동일하게 취업 활동이 금지된다.
미국 현지 공장에서 일을 하려면 비이민 비자 중 하나인 전문직 취업 'H-1B' 비자나 주재원 비자인 'L-1' 비자 등을 취득해야 하는데, 이 비자는 발급에 수개월이 걸리는 것으로 파악된다.
기업의 입장에선 공사 기한과 방식 등을 고려할 때 수시로 인력 파견이 필요한 현실에서 수개월이 걸리는 비자 발급 기간으로 인해 적절한 인력 운용이 어렵다는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H-1B 비자는 '쿼터제'에 따라 미국에서 연간 8만 5000여 명으로 발급 대상을 제한하고 있는 점도 문제다. 한국은 매년 2000명 내외가 H-1B 비자 승인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주로 IT·공학·회계 등 연구직 분야에 주로 발급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H-1B 비자는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 등 거대 기업들이 H-1B 비자를 받은 인력을 대거 채용함에 따라, 정작 우리 기업들이 필요한 한국 인력에게 적절한 할당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미국이 노동력 부족을 보완하기 위한 비농업 단기 근로자 비자인 'H-2B' 비자도 있다. 한국은 2010년부터 H-2B 프로그램 참여 가능국에 포함돼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연간 6만 6000명으로 발급 대상을 제한하고 있으며, 매년 조기 마감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결국 한국 기업의 경우,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B-1 비자나, ESTA를 이용하는 그간의 '관행'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는 지적이다.
이러한 사정은 한국 기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미국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 외에 다른 행정부에서는 사실상 암묵적으로 기업들의 활동을 묵인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 사안을 모두 적발할 경우 현실적으로 미국에서 일하는 상당수 외국인 노동자들이 잠재적 단속 대상이 될 수 있어, 오히려 미국 경제에 악영향을 주거나 민심이 악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한미관계 소식통은 "미국도 이러한 맹점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간 암묵적으로 지나가는 경우가 많았다"라며 "그러나 불법 이민자 단속에 혈안이 돼 있는 트럼프 행정부는 일단 법적 처리가 우선이라는 기조가 강하다"라고 전했다.
현재 우리 정부는 현장대책반을 가동하고 조현 외교부 장관을 본부장으로 하는 재외국민 보호대책본부를 설치하는 등 총력 대응을 펼치고 있다.
이번 사태를 기점으로 한미 간 '비자 문제'와 관련된 전면적인 협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른바 동맹의 기여를 강조하며 자국 투자를 늘릴 것을 요구하면서, 현실적으로 한국인들이 현장에서 제대로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지 않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홍석훈 국립창원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경제적으로 한국의 대미 투자를 압박하면서 제도적으론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일종의 엇박자를 보이는 것"이라며 "한미 간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고 쿼터제와 유예기간 등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이번에 단속이 이뤄졌던 현장은 조 바이든 전 미 대통령이 '제조업 일자리 창출'의 대표적인 치적으로 내세웠던 곳이다.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바이든 업적 지우기'가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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