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유의 한국인 300여명 구금 사태…美 문제 삼은 '비자' 현황 살펴보니

적정 비자 발급에 수개월 걸려…'단기 상용·ESTA 입국' 관행 의존
전문가 "美, 대미 투자 압박하지만…제도는 현실 반영 못 하는 엇박자"

미국 이민당국이 지난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에 위치한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이 공동으로 건설 중인 조지아주 브라이언 카운티 소재 전기차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을 급습해 불법체류자 혐의가 있는 475명을 체포했다. 이들 중엔 한국인 300여명이 포함돼 있다.(ATF 애틀랜타 X 계정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2025.9.5/뉴스1 ⓒ News1 김진환 기자

(서울=뉴스1) 노민호 정윤영 기자 = 강경한 이민 정책을 펼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조지아주 내 현대자동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의 한국인 직원 300여 명을 기습 단속·구금한 사태의 파장이 6일에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토안보수사국(HSI) 등은 지난 4일(현지시간) 현장을 급습했으며, 475명을 체포했다. 이들 중 한국인은 300여 명에 이른다. 미국은 이들이 받은 비자가 실제 이들이 현지에서 한 활동과 맞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단속을 단행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자 발급에만 수개월, 공사 기간 고려하면 비현실적"…美 비자 제도 '맹점'

미국은 영구 이주 목적의 비자와 관광, 사업 유학 등에 필요한 '비이민 비자'를 구분해 발급하고 있다. 한국 등 비자 면제 프로그램(VWP)에 가입된 40개국에 대해선 최대 90일간 단기 관광 및 출장 시 비자 신청을 면제해 주는 전자여행허가(ESTA)를 발급하고 있다. ESTA는 공식적으로 '비자'는 아니다.

이번에 미 당국에 체포된 한국인 대부분은 ESTA나 비이민 비자 중 하나인 '단기 상용'(B-1) 비자를 받고 미국에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B-1 비자를 받으면 최대 6개월간 비즈니스 회의나 계약, 시장 조사 등의 활동이 가능하다. 급여를 받는 현장에서의 직접 노동·설치·시공 등 행위는 엄격히 금지된다. ESTA 역시 B-1과 동일하게 취업 활동이 금지된다.

미국 현지 공장에서 일을 하려면 비이민 비자 중 하나인 전문직 취업 'H-1B' 비자나 주재원 비자인 'L-1' 비자 등을 취득해야 하는데, 이 비자는 발급에 수개월이 걸리는 것으로 파악된다.

기업의 입장에선 공사 기한과 방식 등을 고려할 때 수시로 인력 파견이 필요한 현실에서 수개월이 걸리는 비자 발급 기간으로 인해 적절한 인력 운용이 어렵다는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서울 종로구 주한미국대사관 앞에 미국 비자를 발급 받으려는 시민들이 줄 지어 서 있다./뉴스1 ⓒ News1 김성진 기자

특히 H-1B 비자는 '쿼터제'에 따라 미국에서 연간 8만 5000여 명으로 발급 대상을 제한하고 있는 점도 문제다. 한국은 매년 2000명 내외가 H-1B 비자 승인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주로 IT·공학·회계 등 연구직 분야에 주로 발급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H-1B 비자는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 등 거대 기업들이 H-1B 비자를 받은 인력을 대거 채용함에 따라, 정작 우리 기업들이 필요한 한국 인력에게 적절한 할당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미국이 노동력 부족을 보완하기 위한 비농업 단기 근로자 비자인 'H-2B' 비자도 있다. 한국은 2010년부터 H-2B 프로그램 참여 가능국에 포함돼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연간 6만 6000명으로 발급 대상을 제한하고 있으며, 매년 조기 마감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결국 한국 기업의 경우,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B-1 비자나, ESTA를 이용하는 그간의 '관행'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는 지적이다.

이러한 사정은 한국 기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미국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 외에 다른 행정부에서는 사실상 암묵적으로 기업들의 활동을 묵인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 사안을 모두 적발할 경우 현실적으로 미국에서 일하는 상당수 외국인 노동자들이 잠재적 단속 대상이 될 수 있어, 오히려 미국 경제에 악영향을 주거나 민심이 악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한미관계 소식통은 "미국도 이러한 맹점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간 암묵적으로 지나가는 경우가 많았다"라며 "그러나 불법 이민자 단속에 혈안이 돼 있는 트럼프 행정부는 일단 법적 처리가 우선이라는 기조가 강하다"라고 전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이 6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열린 재외국민보호대책본부 본부-공관 합동 대책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2025.9.6/뉴스1 ⓒ News1 김도우 기자
전문가 "美, 대미 투자 압박하면서 제도는 현실 반영 못해"

현재 우리 정부는 현장대책반을 가동하고 조현 외교부 장관을 본부장으로 하는 재외국민 보호대책본부를 설치하는 등 총력 대응을 펼치고 있다.

이번 사태를 기점으로 한미 간 '비자 문제'와 관련된 전면적인 협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른바 동맹의 기여를 강조하며 자국 투자를 늘릴 것을 요구하면서, 현실적으로 한국인들이 현장에서 제대로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지 않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홍석훈 국립창원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경제적으로 한국의 대미 투자를 압박하면서 제도적으론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일종의 엇박자를 보이는 것"이라며 "한미 간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고 쿼터제와 유예기간 등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이번에 단속이 이뤄졌던 현장은 조 바이든 전 미 대통령이 '제조업 일자리 창출'의 대표적인 치적으로 내세웠던 곳이다.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바이든 업적 지우기'가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한다.

ntiger@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