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시험대 올린 북한…'연말연초' 9차 노동당 대회 전 간 보기

김여정 연쇄 대남·대미 메시지…'두 개의 국가'·'핵보유국' 인정 압박
전문가 "전술적 타이밍 고려한 연계 담화…핵 군축 협상하자는 것"

이재명 대통령, 트럼프 미국 대통령/뉴스1 ⓒ News1

(서울=뉴스1) 노민호 기자 = 북한이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의 담화를 통해 한미를 향한 압박 공세를 재개했다. 한미 모두에게 '근본적 사고방식 변화'라는 높은 요구사항을 제시하며 한미를 시험대에 올린 뒤 반응을 살피려는 의도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에 "핵보유국 지위 인정하라" 촉구하며 '새로운 사고' 요구

김 부부장은 29일 담화에서 "미국이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패한 과거에만 집착한다면 조미(북미) 사이의 만남은 미국 측의 희망으로만 남아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2018~2019년에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비핵화 협상을 진행한 것을 상기하며 '비핵화를 전제로 한 협상의 재개가 가능하다'는 백악관의 입장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 부부장은 자신들이 그사이 불가역적인 핵보유국의 지위와 능력을 갖췄으며, 한반도의 지정학적 환경도 달라졌다고 주장하며 "엄연한 사실에 대한 인정이 미국이 앞으로 모든 것을 예측하고 사고할 때 전제가 돼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지정학적 환경'은 북한이 지난 2018년엔 중국을 뒷배로 삼아 미국과의 협상에 나섰던 것과 달리 현재는 러시아와 밀착하면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떨어지거나, 러시아의 적극적인 대북지원에 따라 자신들의 협상 카드의 값이 높아진 상황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 부부장의 대미 담화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제스처, 미 행정부의 현 스탠스를 전면적으로 거부한다는 입장으로 보인다. 실패로 끝난 지난 2018~2019년의 비핵화 협상 때와 달라진 모습이 미국에게서 보이지 않는다는 차원에서다.

김 부부장은 "핵을 보유한 두 국가가 새로운 사고를 바탕으로 다른 접촉 출로를 모색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북미의 협상과 대화는 미국이 자신들에게 '뭔가를 베푸는 자세'를 거두고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다면 어려울 것이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 AFP=뉴스1
한국에는 '남북 두 국가' 인정 요구…과거 방식 '폐지' 압박

김 부부장은 전날엔 이재명 정부를 향해 첫 공식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서 어떤 정책이 수립되든 남북이 마주 앉을 일은 없을 것"이라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김 부부장은 이재명 정부 출범 후 단행된 대북전단 살포 통제,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 등 일련의 유화 조치에 대해 "그 모든 것은 한국이 스스로 초래한 문젯거리들로서 어떻게 조처하든 그들 자신의 일로 될 뿐이며 진작에 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을 가역적으로 되돌려 세운 데 불과한 것"이라며 '평가 대상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이재명 정부의 대북 조치 및 기조가 대화 접점을 만들기엔 충분하지 않다는 압박성 메시지로 해석된다.

특히 그는 "조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한국)관계는 동족이라는 개념의 시간대를 이미 완전히 되돌릴 수 없게 벗어났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지난 2023년 12월 당 전원회의에서 처음 밝힌 '남북 두 국가론'을 고수하며 과거의 남북관계 공식에 따른 제스처엔 반응하지 않겠다는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즉, 김 부부장은 한국 정부가 민족과 통일 개념이 중심이 된 과거의 남북관계 유산을 지우고 자신들을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이상 움직이지 않겠다는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의 입장을 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미 유화 기조 확인 후 공세…9차 당 대회 때 대외정책 수립까지 이어질 듯

김 부부장의 담화는 지난 6월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 수령을 거부하고, 이재명 정부 출범 후 이어진 대북 유화책을 충분히 확인한 뒤 나온 것이다. 북한의 입장에선 자신들이 유리한 입장에서 압박 공세를 가할 타이밍이라는 판단을 내렸을 수 있다.

북한은 올해 연말이나 내년 초에 개최될 것으로 예상되는 제9차 노동당 대회 때 5년 단위의 새 대외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 한미를 향한 정책도 새로 구성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온 공세는 자신들의 높은 요구조건에 한미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테스트'하려는 성격도 있어 보인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김 부부장의 연이은 담화는 연계돼 있다. 북한이 굉장히 신중하게, 전술적으로 타이밍을 보고 낸 것"이라며 "특히 '새로운 사고'가 핵심 키워드인데, 미국을 향해 이전의 북미 정상회담은 잊어버리고 핵 군축 협상을 하자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라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다만 '정치적 승리'가 중요한 트럼프 대통령도 이제는 북한이 원하는 걸 쉽게 들어줄 수는 없을 것"이라며 "그는 2018년 북미 정상회담이 잘 됐을 때보다 2019년 자신의 결정으로 회담이 결렬됐을 때 더 많은 지지를 받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ntiger@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