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조정' 10년 묵은 약 다시 본다…업계 "산업 흔들기"[약가개편]

3~5년마다 약가 조정…"시스템 구축해 평가 예측 가능"
업계 '2012년 일괄 인하' 공포 재엄습…위기감 고조

한 시민이 서울 시내에 있는 약국에 들어가고 있다./뉴스1 안은나 기자

(서울=뉴스1) 황진중 기자 = 정부가 2012년 일괄 약가 인하 이후 10년 넘게 가격 변동 없이 높은 수준을 유지해 온 '기존 등재 의약품'에 대해 대대적인 가격 재평가를 예고했다. 신규 복제약(제네릭)뿐만 아니라 기존에 등재된 약물까지 목표로 삼아 가격 거품을 걷어내겠다는 취지다.

제약바이오 업계는 이러한 정책적 불확실성이 미래 투자를 위축시키고, 나아가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까지 갉아먹을 수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10년 이상 변동 없던 약가, 3년 걸쳐 40%대로

보건복지부는 28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에 약가제도 개편 방향을 보고했다. 개편안에 따르면 기등재 의약품 중 2012년 약가 제도 개편 이후 사후 관리를 통해 약가가 조정되지 않은 품목들은 우선 조정 대상이 된다.

정부는 등재 시점과 현재 약가 수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해마다 일정 비율씩 가격을 인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는 과거와 같은 일회성 '충격 요법'이 아닌 단계적 연착륙을 유도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다.

필수의약품이나 수급 불안정이 우려되는 약제는 인하 대상에서 제외하고, 보상을 강화해 공급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안전장치 등을 마련했다.

이중규 건강보험정책국장은 "10년 이상 약가 변동이 없었다면 복제약 약가 차로 인한 이익은 충분히 공유했다고 본다"면서 "이들 약제를 대상으로 3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약가를 40%대 수준으로 낮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업계 "2012년 악몽 재현되나"… 투자·수출 차질 우려

업계 반응은 싸늘하다. 앞서 2012년 일괄 약가 인하 당시 겪었던 경영 위기가 재연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감지된다.

제약바이오 업계 관계자 A 씨는 "과거 2012년 일괄 약가 인하 당시 업계 관계자들이 장충체육관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던 것이 다시 거론될 정도로 분위기가 심각하다"며 "비대위 등을 중심으로 성명서 발표나 집단행동 목소리가 나와야 할 것 같다는 말이 나올 만큼 위기감이 최고조"라고 말했다.

제약바이오 기업들은 이번 조치가 현재 진행 중인 신규 투자와 미래 전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제약바이오 업계 관계자 B 씨는 "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은 기업들의 수익성을 저하해 연구개발(R&D), 설비 확충, 인재 확보 등 미래 성장동력 투자를 위축시킬 것"이라며 "우리나라 제약바이오 산업이 글로벌로 도약하는 중요한 시기인데, 혁신의 속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제약바이오 업계 관계자 C 씨는 "단기적인 재정 절감 효과는 있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번 제도는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 전체의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며 "정부가 약가 정책을 도구로 산업계를 지속적으로 흔드는 방식은 경영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한 제약바이오 기업의 연구진이 신약 후보물질 분석을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뉴스1
우리나라 약가 낮아지면 수출 타격…참조가격제 역설

이번 개편안이 단순히 내수 시장의 문제를 넘어 국산 신약의 글로벌 진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해외 국가들이 우리나라 약가를 참조해 자국 내 수입 가격을 결정하는 사례가 많아서다.

제약바이오 업계 관계자 D 씨는 "최근 우리나라 약가를 참조하는 국가들이 늘어나는 추세라, 국내 약가가 낮게 잡히면 수출 가격도 낮아져 결국 국가 전체적인 손해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기업이 제값을 받기 위해 미국 등 해외에서 먼저 제품을 출시하는 사례처럼, 정작 우리 국민이 국산 신약을 먼저 혜택받지 못하는 '코리아 패싱'의 모순이 심화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정부는 '약가 유연 계약제'(가칭) 도입을 통해 문제 해결을 시도하겠다는 입장이다. 표시 가격은 높게 유지하되 실제 가격은 환급을 통해 낮추는 이중 가격제를 확대해 대외적인 약가 수준을 방어하고 신약의 수출과 등재를 지원하겠다는 방안이다.

이중규 국장은 "표시 가격을 변동시켜 외국에서의 참조 가격 문제를 해소하고, 실제 건보 재정에는 영향이 없도록 운영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측 가능한 주기로 '약가 평가' 예고

정부는 이번 개편안에 '주기적 약가 평가·조정 기전'을 포함해 예측 가능성을 높이겠다고 강조했다.

해외 주요국처럼 3~5년 주기로 약제별 청구액, 복제약 등재 수 등을 종합 평가해 약가를 조정하는 시스템을 정착시키겠다는 의지다. 또 사후 관리 제도들의 조정 시기를 연 2회(4월·10월)로 정례화해 행정 부담을 줄일 계획이다.

한편 복지부는 이 같은 약가제도 개편안을 건정심에 보고한 후 제약바이오 업계·환자단체·전문가 의견을 추가로 수렴해 2026년 1분기 중 최종안을 확정할 예정이다. 이어 관련 고시·규정 개정을 거쳐 7월부터 과제별로 순차 시행할 계획이다.

ji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