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면서 편안한 사회적 관계망을 만드는 법[김현정의 준비된 노후]

김현정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교수(대한디지털헬스학회 이사장)

편집자주 ...필자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뇌신경과학 분야를 연구한 학자이자 대한디지털헬스학회 이사장으로 의료계와 학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습니다. 의학과 치의학의 경계, 장애인 치과, 지역사회 구강돌봄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칼럼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은퇴 후 황금 노후를 준비하는 어르신들에게 건강한 노후, 슬기로운 노후 준비를 위한 길라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현정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교수(대한디지털헬스학회 이사장)

농경사회에서는 자녀가 곧 노후 준비의 핵심이었다. 자녀를 키우는 일은 자립이 흔들리는 고령기의 돌봄을 준비하는 일이었고, 가족과 마을공동체가 자연스럽게 노후의 안전망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노후 준비의 개념은 달라졌다.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같은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건강을 유지해 의료비와 돌봄 부담을 줄이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돈과 건강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늘어난다. 50세를 넘어서면 노화와 함께 예상하지 못했던 질병과 상실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기도 한다. 혼자 병원에 가기 어려울 때 누가 함께 가줄 것인지, 갑자기 몸이 아플 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것인지, 식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살펴줄 사람이 있는지, 무엇보다 일상에서 안부를 나누고 외로움을 덜어줄 사람이 있는지가 삶의 질을 좌우한다. 학문적으로 가족·친구·이웃·지역사회와의 연결은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사회적 관계망(social network),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라는 중요한 건강 자원으로 설명된다. 준비된 노후란 결국 돈과 건강을 준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나이가 들어서도 익숙한 지역사회 안에서 사람들과 편안하게 연결돼 살아갈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어버이날인 5월 8일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노인복지관에서 관내 어린이집 아이들이 어르신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있다. (뉴스1DB) ⓒ 뉴스1 김영운 기자
고령자 건강은 병원 밖의 일상에서 만들어진다

캐나다의 마크 라론드(Marc Lalonde)는 1974년 '캐나다인의 건강에 대한 새로운 관점'(A New Perspective on the Health of Canadians) 보고서에서 건강을 결정하는 요인을 인간생물학, 환경, 생활양식, 보건의료조직의 네 영역으로 제시했다. 이른바 '라론드 건강장(Health Field) 개념'은 건강이 병원과 의사의 진료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살고, 어떻게 생활하는지가 함께 건강을 결정한다는 관점의 전환이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주거환경, 이동 가능성, 식사와 운동, 사회적 고립, 이웃과의 관계 같은 일상의 조건이 중요해진다. 따라서 준비된 노후에는 건강한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과 사람 간 연결, 그리고 필요할 때 의료와 돌봄에 접근할 수 있는 지역사회 기반까지 포함돼야 한다.

올해 3월 27일부터 '의료·요양 등 지역 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이 전면 시행되면서 우리나라 돌봄체계도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노쇠·장애·질병 등으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병원이나 시설에 의존하기보다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자신이 살던 집과 지역사회에서 계속 생활할 수 있도록 의료·요양·돌봄을 통합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다. 지방자치단체가 개인의 의료·돌봄 필요도와 생활여건을 살피고 맞춤형 지원을 연계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커진 뒤 대응하는 체계에서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지역사회에서 위험을 조기에 발견하고 예방적으로 관리하는 체계로의 변화라는 의미가 있다.

AI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다

지난 6일 정부가 관계부처 합동으로 제시한 '인공지능(AI) 기본의료 전략'은 이러한 변화에 디지털 기술을 더했다. 지역·필수·공공의료의 공백을 AI로 보완하고 보건소와 의료취약지 일차의료기관 등에 진료 지원과 환자 관리 AI를 확산하겠다는 방향이다.

ⓒ 뉴스1 양혜림 디자이너

그러나 초고령사회에서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AI 기본의료의 출발점은 기술이나 의료기관이 아니라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사람이 살아가는 일상과 지역사회여야 한다. 건강 문제는 병원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식사를 거르고,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못하고, 운동량이 줄고, 구강 관리가 어려워지고, 외출과 사회적 관계가 끊기는 작은 변화가 쌓여 질병과 돌봄의 필요로 이어진다. AI가 위험을 조기에 발견하더라도 이를 생활 속에서 확인하고 실제 도움으로 연결해 줄 사람과 지역사회가 없다면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초고령사회에는 보건소와 복지관 같은 공공기관뿐 아니라 주민이 직접 참여하고 서로의 건강과 생활을 살피는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살아 움직이는 지역사회 관계망이 필요하다. 사회적협동조합이나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과 같은 주민 참여형 조직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조합원이 단순한 서비스 이용자가 아니라 지역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주체가 돼 건강교육, 예방관리, 방문돌봄, 구강관리·영양·운동, 의료기관 연계와 사회활동을 생활권 안에서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AI와 디지털 기술도 이러한 공동체와 연결돼 건강 위험을 알려주고 필요한 사람과 서비스를 찾아주는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지역사회 돌봄의 수단이어야지 돌봄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편안한 사회관계망은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오래전부터 계와 두레, 품앗이처럼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이웃과 함께 나눠 온 전통이 있다. 오늘날 돌봄의 부담을 국가가 모두 책임질 수도 없고, 개인과 가족에게만 맡길 수도 없다. 건강할 때는 내가 다른 사람을 돕고, 필요할 때는 자연스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관계가 있어야 한다.

결국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초고령사회의 지속 가능한 돌봄은 공공서비스, AI와 디지털 기술, 주민이 만드는 지역조직, 그리고 상호부조가 서로 연결될 때 가능하다. 기술이 사람을 대신하는 사회가 아니라 기술을 활용해 사람들이 서로 더 잘 연결되고 돌보는 사회, 그것이 사람 중심의 AX·DX 기본의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그리고 그러한 편안한 사회적 관계망은 노년에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내가 사는 동네에서 사람을 만나고, 조금씩 돕고, 도움받는 연습을 하는 것 역시 준비된 노후의 중요한 시작이다.

ⓒ 뉴스1 김초희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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