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정의 준비된 노후]노후생활의 힘 '복지용구'…사용자 중심 '가치' 되살려야
정부지원 복지용구 가격, '사용자 중심' 가치보단 예산관리 우선
김현정 서울대학교 치과병원 교수
"나이가 들어 몸이 불편해지면 어떻게 생활할까."
노후를 준비할 때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걱정이다. 정부가 내놓은 답은 장기요양보험제도를 통한 노인의 자립을 지원하는 복지용구 지원사업이다. 현재 전동침대, 수동 휠체어, 안전 손잡이, 욕창 예방 매트리스 등 총 18개 품목, 564개 제품이 복지용구로 등록돼 있으며, 장기요양등급을 받은 어르신은 연 최대 160만 원 한도 내에서 일부 본인부담금만으로 이들 용품을 지원받을 수 있다. 제도만 보면 노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든든한 장치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장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쓸 수 있는 게 없다는 지적부터 "서류는 통과됐지만 정작 필요하던 건 지원 대상이 아니더라”, “사용법도 설명 없이 던져주듯 두고 갔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결국 복지용구 제도는 노인의 자립과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출발했지만, 현장에선 종종 '쓸모없는 물건만 제공된다'는 평가다.
좋은 제도인데 왜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한 제품이 도달하지 못할까. 가장 큰 문제는 ‘가격 결정 구조’다. 특히 가격 기준의 대상과 가격 결정 절차가 원인으로 꼽힌다.
세부적으론 2008년에 제정된 가격 결정 체계의 구조적 한계가 자리하고 있다. 장기요양보험의 예산 관리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는 하지만, ‘최소한의 원가 기준’에 따라 복지용구 가격이 결정되며, 현실과 괴리된 고시가격이 제시된다. 이 과정에서 제품의 기능 다양성, 사용자의 자립 향상, 돌봄제공자의 부담 경감과 같은 '사용자 중심의 가치'는 평가기준에서 차순위로 크게 밀려난 처지다.
심지어 새로운 기술이나 복합 기능이 포함된 제품이 시장에 나와도, 고시가를 초과했다는 이유로 급여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등재까지 수년이 소요된다. 이에 따라 제조사는 제품의 질을 낮춰 고시가에 맞추거나, 아예 복지용구 시장을 포기하고 일반 소비재 시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제도는 현장의 수요를 반영하지 못하고, 사용자는 '어설픈 용구'만을 받아들이는 구조에 놓이게 된다. 신기술 예비급여 평가 3년을 경험하면서 느꼈던 제도 개선을 위한 세 가지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고시가격 산정 방식을 현실화해야 한다. 특히 기술혁신형 제품일수록 고시가를 맞추기 어려운데, 정작 혁신성이나 사용자 편익은 가격에 반영되지 않고 있다. 기본형과 고기능형 등으로 구분해 차등 급여를 적용하거나, 기능 가산제를 도입해 유연한 급여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둘째, 복지용구 급여의 적정성을 평가할 때 사용자 중심 가치를 포함해야 한다. 현재는 제품의 물리적 사양만이 기준이지만, 실제로 복지용구 하나가 흡인성 폐렴과 낙상을 예방하고, 욕창을 줄이며, 돌봄제공자의 근골격계 부담을 경감하는 등 사회경제적 효과가 매우 크다. 이를 반영한 비용-효과 기반 평가모형의 도입이 절실하다.
셋째, 신기술 제품에 대한 합리적인 가격 산정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 혁신형 고령친화제품과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현행 제도는 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안전성과 유효성이 입증된 제품에 대해서는 ‘선급여 후평가’ 방식을 도입해 시장 진입 장벽을 낮추고, 실제 사용 결과에 따라 급여 여부를 재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장기간의 연구개발을 거친 고기능성 제품일수록 개발비와 기술 혁신 가치가 가격에 반영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는 국내 제도의 선진화를 넘어, 글로벌 고령친화시장 선점과 수출 경쟁력 확보로도 이어질 수 있다. 국내 복지 시스템에서 먼저 검증되고 사용된 제품은 해외에서도 신뢰를 얻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
복지용구는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노인의 일상을 지탱하는 필수 도구이며, 돌봄제공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핵심 장치다. 가격을 낮게 책정하는 것이 반드시 ‘절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품질 제품으로 인한 낙상 사고, 기능 미흡으로 인한 방치는 결국 더 많은 사회적 비용과 인력 부담으로 이어진다. 복지용구의 가격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돌봄의 질과 사용자의 존엄을 담은 사회적 기준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돌봄로봇을 포함한 혁신형 고령친화제품이 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최초의 제도적 통로가 바로 복지용구 시장이라는 점이다. 지금이야말로 복지용구 제도의 근본적인 재설계를 시작해야 할 때다. 제도는 있지만, 돌봄은 없는 이 현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h9913@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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