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2억 벌었다는데…" 주식 열풍이 키운 '투자 우울증'

연금 해지·펀드 환매·대출까지…포모·투자 손실에 불면·우울 호소 증가
정신과 전문의 "고위험 투자, 도박중독과 유사한 양상…관리체계 필요"

ⓒ 뉴스1 양혜림 디자이너

(서울=뉴스1) 천선휴 기자

친구는 주식으로 2억 원을 벌어 새 차를 샀다는데…. 난 노후 자금을 날리게 생겼어요.

60대 A 씨는 최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주식 열풍이 불어도 은행 예금만 고집하던 그는 주변에서 "몇 달 만에 수천만 원, 수억 원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국 평생 모은 노후 자금을 꺼내 반도체 종목에 투자했다. 주당 32만 원에 매수한 주식은 어느새 25만 원대로 떨어졌다. 손실은 커져만 가고 밤마다 "왜 그때 샀을까", "이제 노후는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에 잠을 설친다.

A 씨 사례는 최근 정신건강의학과 외래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풍경이다. 주가가 오를 때는 '나만 기회를 놓쳤다'는 불안에 떨어질 때는 손실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리며 불면과 우울 증상을 호소하는 투자자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최근에는 노후 대비 자금까지 증시로 이동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연금과 펀드는 물론 대출까지 투자 자금으로 활용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27일 송언석 국민의힘 의원이 금융감독원과 한국예탁결제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1∼5월 연금저축보험 해지 건수는 7만 2477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2.7% 증가했다. 같은 기간 해약금 규모도 1조 7421억 원으로 54.8% 늘었다.

펀드 환매도 급증했다. 올해 1∼5월 환매 건수는 180만 9183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7.3% 증가했고 환매 금액은 약 2786조 원으로 지난해보다 146.1% 증가했다.

주식 투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대출도 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은행권 가계대출은 한 달 새 7조 6000억 원 증가해 지난해 8월 이후 가장 큰 증가 폭을 기록했다. 특히 신용대출 등을 포함한 기타 대출은 개인의 주식투자 확대 영향으로 3조 3000억 원 늘었다.

과열된 투자 열풍의 부작용은 대학가에서도 나타났다. 최근 경북대학교에서는 한 동아리 임원이 동아리 공금 677만 원을 개인 증권계좌로 옮겨 주식에 투자한 사실이 드러나 특별감사가 실시됐다. 해당 학생은 배당금을 받아 동아리 운영비로 활용하려 했다고 해명했지만, 공금으로 투자에 나선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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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이처럼 투자가 일상 깊숙이 파고들면서 수익과 손실에 따른 심리적 충격도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현장에서는 투자 실패나 주변의 투자 성공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으로 불안과 우울을 호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박종석 원장은 최근 YTN 라디오에 출연해 "최근 이른바 '주식 우울증'이나 주식 중독, 투자 손실을 호소하는 신규 환자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누가 SK하이닉스를 팔아 2억 원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칼에 찔리거나 불에 뎄을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뇌에 통증이 전달된다"며 "그 강도는 '전치 4주' 수준에 해당한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말했다.

그는 "남이 잘되면 고통을 느끼는 뇌 부위가 따로 있다. 이는 단순히 질투심이나 자존감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통증을 담당하는 뇌 회로가 활성화되기 때문"이라며 "친구가 돈을 벌어 좋은 집으로 이사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따라가지 못했다는 열등감과 불안에 사로잡히면 편도체가 자극되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분비돼 불면이나 소화불량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 원장은 자신 역시 준비 없이 욕망과 소외에 대한 두려움(FOMO·소외 공포)에 휩쓸려 정치테마주와 코스닥 제약 종목 등에 투자했다가 3억2000만 원이 넘는 손실을 본 뒤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 같은 우려는 해외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2023년 국제학술지 중독 행동(Addictive Behaviors)에 발표된 포괄적 문헌고찰(scoping review)에 따르면 가상자산 거래가 문제성 도박과 일관된 연관성을 보였으며 고위험 주식 투자자와도 유사한 행동적 특성을 보이는 것으로 분석됐다. 연구진은 투자 행태와 정신건강의 연관성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국내 전문가들도 투자 자체를 질환으로 볼 수는 없지만 일부 투자자의 경우 도박중독과 유사한 행동 양상을 보일 수 있다는 점에는 공감하고 있다.

전상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투자 자체를 병으로 볼 수는 없지만 일부는 손실을 만회하려는 생각으로 투자 규모를 계속 키우거나 성공 경험만 반복적으로 추구하는 등 중독과 비슷한 행동을 보인다"며 "치료가 필요한 수준까지 진행돼도 대부분 스스로 병원을 찾지 않고 가족의 권유로 내원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알코올중독이나 도박중독은 공인된 선별검사와 평가척도가 있지만 투자중독은 공식적인 자가평가 도구조차 마련돼 있지 않다"며 "주식을 시작하는 방법은 쉽게 배울 수 있지만 과도한 투자의 위험성과 중독 가능성을 교육받을 기회는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모든 투자자를 중독자로 볼 수는 없지만 일부 고위험 투자자는 조기에 발견해 상담과 치료로 연계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며 "투자 열풍이 이어질수록 정신건강 문제도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sssunhue@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