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만 쪽' 엡스타인 파일 추가 공개…정쟁 '땔감' 된 피해자들

추가 관련 정황 나와도…법무부 "파일만으로 기소 못해"
양당, 트럼프·클린턴 공격 골몰…피해자는 신원 노출 피해

미국 법무부가 19일(현지시간) 제프리 엡스타인 사건에 대한 수사 기록을 공개했다. 법원 문서 사진. 2025.12.19 ⓒ AFP=뉴스1

(서울=뉴스1) 윤다정 기자 = 미 법무부가 1월 30일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의 수사 자료를 추가로 공개했다. 동영상, 사진, 이메일 등이 포함된 추가 공개 자료의 분량은 무려 300만 쪽 이상이다.

양이 매우 방대한 데다 PDF 파일 형식으로 조각나 있어 열람이 불편한 탓에, 사건에 관심을 가진 일부 대중이나 언론 취재에 의해서만 명사들과 엡스타인의 명사들 간 과거 접점이 간헐적으로 재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피해자들이 원하는 회복적 정의와는 거리가 먼 상황이다. 죄를 물어야 할 엡스타인은 죽음으로 도피했고, 공화·민주 양당이 엡스타인 파일을 정쟁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동안,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신원이 노출된다는 이중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추가 기소 없다" 선 그은 법무부…"범죄와 무관" 주장만 메아리

현재로서는 미 수사 당국이 각계 명사들의 엡스타인의 성 착취 범죄와의 연관성을 추가로 파헤치거나, 이들을 법의 심판대에 올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토드 블랜치 법무부 차관은 지난 1일 CNN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에 출연해 엡스타인 관련 논란에 대해 추가 기소는 없을 것임을 시사했다.

블랜치는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엡스타인 파일이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실제로 겨냥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안에 있냐는 문제"라며 "서신, 이메일, 사진이 많다. 엡스타인 또는 주변 인물들이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끔찍한 사진도 많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는 누군가를 기소할 수 없다"고 말했다.

관련자 중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이들은 작위를 박탈당하고 왕실 공식 거처에서도 퇴거당한 앤드루 전 영국 왕자, 경질된 피터 맨델슨 전 주미 영국 대사, 오픈AI 이사직에서 물러나는 등 대외 활동을 전면 중단한 래리 서머스 전 미 재무장관 정도다. 이마저도 형사 책임을 진 것은 아니다.

미국 연방 하원 감독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들이12일(현지시간) 미성년자 성착귀범 고(故) 제프리 엡스타인의 개인 소장품에서 나온 사진들을 공개했다. 사진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제프리 엡스타인(가운데)이 찍힌 사진. ⓒ AFP=뉴스1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등은 자신이 "엡스타인의 범죄와는 무관하다"는 주장만을 반복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논란의 중심에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의혹이 아직 시원하게 해소되지 않았다.

연방수사국(FBI) 면담 요약본에 담긴, 2006년 7월 트럼프 대통령이 플로리다주 팜비치 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모두 그가 이런 일을 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는 내용이 최근 추가로 드러나기는 했다. 당시는 엡스타인의 성범죄 혐의가 처음 드러났던 때였다.

그러나 관련 언급이 반복됐을 뿐, 의혹을 입증하는 단계로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 법무부는 "대통령이 20년 전 경찰에 연락했다는 점을 입증할 추가 증거는 인지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트럼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은 법무부가 유죄를 입증할 만한 문서를 은폐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하원 법사위원회 민주당 간사 제이미 래스킨(메릴랜드) 하원의원은 "블랜치는 트럼프의 개인 형사 변호인에서 법무부 이인자로의 역할 전환을 단 한 번도 시도한 적이 없다"며 "팸 본디 법무장관이 공개를 요구하는 법을 거의 준수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다.

공화당은 엡스타인과 과거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진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하원 감독위원회 증언을 거부하자, 이들을 의회 모독죄로 기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클린턴 부부는 이달 말 열리는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할 예정이다. 클린턴 부부의 부비서실장인 앵젤 우레냐는 지난 2일 X(구 트위터)에 두 사람이 "선서하에 알고 있는 사실을 말했으나 당신들(공화당)은 신경 쓰지 않았다"면서 그럼에도 두 사람은 청문회에 출석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12일(현지시간) 미 하원 감독위원회 민주당 의원들이 공개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미성년 성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이 함께 한 사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유력 인사들의 모습을 담은 19장의 사진 중 하나다.(하원 감독위 민주당 X 계정, 재판매 및 DB금지) 2025.12.12. ⓒ 뉴스1 류정민 특파원
"보호하겠다더니 신상 정보 포함돼, 용납할 수 없어"…피해자들 '분통'

공화·민주 양당과 그 지지자들이 파일에 공개된 유력 인사들의 이름을 두고 정쟁을 벌이며 무리한 속도전을 벌이는 사이, 정작 피해자들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피해자들은 엡스타인이 미성년자 성 착취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기다리던 중 교도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당시, 사건의 진상이 영영 어둠 속으로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을 이미 맛보았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대니엘 벤스키는 CNN에 "법무부가 공개한 문서에 일부 피해자들이 식별할 수 있게 포함된 점 때문에 피해자들이 좌절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보호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며 법무부가 가린 정보의 기준이 투명하게 설정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피해자 19명은 이미 지난 1월 법무부 감찰관실에 가림 처리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검토하고 향후 문서 공개 과정도 감독해 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

당시 이들은 "여러 사례에서 학대에 가담했거나 학대를 조장한 혐의를 받는 사람들의 이름은 삭제됐지만, 생존자들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며 "어떤 경우에는 생존자들의 이름, 맥락적 식별 정보, 또는 그들을 공개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기타 정보가 제대로 보호되지 않았다"고 시정을 요구했으나 지켜지지 않은 모습이다.

또 다른 피해자 리사 필립스는 BBC에 "법무부는 우리의 요구 3가지를 모두 어겼다. 많은 문서가 아직 공개되지 않았고, 공개 시한이 오래전 지났고, 많은 생존자의 이름을 공개했는데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그들이 우릴 상대로 장난을 치는 것 같지만 투쟁을 멈추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1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하원 법사위원회 청문회에 팸 본디 미 법무장관이 출석해 증언하는 가운데,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의 피해자가 참석해 지켜보고 있다. 피해자가 입은 옷에 "진실은 아직 가려져 있다. 엡스타인 피해 생존자들은 여전히 정의를 기다리고 있다. 관련 파일을 전면 공개하라. 착취 없는 세상을 위하여"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2026.02.11. ⓒ AFP=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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