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워싱턴DC 비상사태 선포와 민주당의 위기
- 류정민 특파원
(워싱턴=뉴스1) 류정민 특파원 = 미국의 수도, 세계 정치의 심장부로 불리는 '워싱턴 DC'가 치안 문제로 비상사태를 선포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일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1일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비극적인 비상사태"라면서 향후 30일간 워싱턴 DC 경찰을 연방 정부 지휘하에 두고 치안 작전을 실시하겠다고 선언했다.
트럼프는 "워싱턴 DC의 법과 질서, 공공 안전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이번 조치가 단순히 치안만이 목적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표면적인 발단은 이달 3일 정부효율부(DOGE)의 고문으로 트럼프 행정부에 몸담았던 에드워드 코리스틴이 10대 흑인 청소년 여러 명에게 폭행을 당한 사건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건 발생 이틀 후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피습 당시 피투성이로 거리에 앉아 있는 코리스틴의 사진과 함께 "워싱턴 DC의 범죄가 완전히 통제 불능으로, 즉각 대처하지 않으면 연방정부가 도시 통제에 나설 수밖에 없다"라는 글을 올리며 이번 조치를 예고했다.
1년 전 워싱턴 DC 특파원 부임 직후 한국 특파원 동료들이 해준 말이 새삼 떠올랐다. '워싱턴 DC 시내는 가급적 밤늦은 시간에는 걸어 다니지 말라. 미국 내 가장 위험한 도시 중 하나'라는 말이었다.
워싱턴 DC가 미국의 계획된 행정수도라는 것은 어디선가 들었고, 수도인 만큼 다른 대도시보다 꽤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정반대의 말을 들으니 어리둥절했었다.
1800년부터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의 DC는 '컬럼비아 특별자치구'(District of Columbia)의 약자다. 풀어쓰자면 '워싱턴 컬럼비아 특별구'라고 부를 수 있겠다.
과거를 짚어보자면, 독립전쟁(1775~1783년) 당시 영국의 13개 식민주였던 미국은 각 주가 독립된, 느슨한 연합체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전체를 대표할 '수도' 개념도 없었다고 봐야 한다.
전쟁의 와중에 대륙회의가 열리는 장소가 사실상 수도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임시 수도 역할을 한 도시는 뉴욕,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랭커스터, 요크, 프린스턴, 아나폴리스 등 다양했다.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당시 13개 주의 중간 지점인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의 경계인 포토맥강 주변을 수도 후보지로 정했다. 수도 명칭은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이름에 신대륙 개척 시대를 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서 유래한 컬럼비아를 더해 워싱턴 DC로 명명했다고 한다.
당시 연방정부에 워싱턴 DC 건설을 위해 토지를 양도한 메릴랜드와 버지니아는 모두 노예제에 기반한 농장 운영에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후 남북전쟁(1861~1865년)으로 인해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자유를 찾아 흑인이 수도로 모여들었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져 워싱턴 DC는 미국 내에서 흑인 인구가 다수(약 40%)인 도시를 일컫는 '초콜릿 시티'로 불린다.
서울의 약 4분의 1 면적에 백악관, 의회의사당, 연방대법원을 비롯해 많은 연방 정부의 주요 관청이 있고, 174개 국가 대사관과 국제통화기금(IMF) 본부 등이 있는 명실상부한 전 세계 정치, 외교 중심지이지만 인구는 약 70만 명에 불과하다.
다만 인근 버지니아, 메릴랜드 주변을 포함한 워싱턴DC를 중심으로 한 도시권 인구는 1000만 명에 육박해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다음가는 4번째 도시권에 해당한다. 버지니아, 메릴랜드 등에 거주하며 워싱턴 DC 관공서로 출퇴근하는 중산층 이상 백인이 꽤 많다고 보면 된다.
도시 명칭의 유래와 역사를 짚어본 이유는 미국의 50개 주와는 별개의 특별행정구역인 워싱턴 DC는 자치권이 제한된다는 점을 설명하려 한 때문이다. 미국은 수도를 정하면서 헌법에 연방의회에 워싱턴 DC에 대한 배타적 입법권을 부여했고, 도시 통치도 연방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형태였다.
1973년 제정된 홈룰법(Home Rule Act)에 따라 워싱턴 DC 주민들은 시장과 시의회를 선출할 권리를 얻었지만, 해당 법에는 대통령이 비상시에 워싱턴 DC 경찰을 통제할 수 있는 예외조항이 있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에 이를 근거로 공공안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번 비상사태 선포를 둘러싸고 애초에 민주당과 진보진영의 반발까지 계산에 넣은, 이른바 '민주당의 덫' 이야기가 나온다는 점이다.
불법이민자 및 국경에 대한 강력한 단속이 미국인 다수의 지지를 받는 가운데 이번 트럼프의 이번 조치는 범죄에 강력히 대응하는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더욱 부각하는 효과가 있다.
그는 작심한 듯 비상조치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시카고, 볼티모어, 오클랜드, LA, 뉴욕 등 민주당 소속 흑인 시장이 있는 도시들을 싸잡아 공격했는데, 마치 '한 번 덤벼봐라'라고 도발하는 듯했다.
트럼프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지도부는 범죄 대응의 정치적 위험성을 인식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일부 의원들은 '연방 권력 남용'이라며 강경 비판했지만, 절제된 메시지에 머무르는 듯하다. 미국인의 뿌리 깊은 '범죄 무관용 정서' 속에서 성급한 반발은 오히려 역풍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LA 주방위군 투입이 불법 이민 문제에 대한 강경 대응에 대한 반발을 정면 돌파한 사례였다면, 이번 워싱턴 DC 개입은 성범죄자 엡스타인 문건 공개라는 민감한 사안을 벗어나려는 국면전환 카드로 볼 수 있다.
이번 조치를 두고 여러 논란이 있겠지만 위기 때마다 자신들을 향한 도발로 위기를 넘고 있는 트럼프를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무기력한 민주당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트럼프는 기자회견에서 "수도가 더러우면, 나라 전체가 더러운 것"이라며 더 이상 방치하지 않겠다고 했다. 노숙자들을 겨냥한 말이겠지만 흑인 민주당 시장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한 언사일 수 있다.
민주당 스스로 개혁의 길을 찾지 못한다면, 트럼프의 또 다른 도발에 존재감 없이 재차 침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ryupd01@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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