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 갇힌 트럼프 지지층…'엡스타인 파일' 쫓는 이유[최종일의 월드 뷰]
- 최종일 선임기자

(서울=뉴스1) 최종일 선임기자 = "탕! 탕! 탕!"
2016년 12월 4일, 29세의 에드거 매디슨 웰치는 워싱턴D.C에 있는 피자 가게 안에서 잠겨 있는 문을 열기 위해 소총을 마구 쏘아댔다. 미국에서 총기 사고가 나면 빠지지 않는 돌격 소총 AR-15의 총구는 불을 뿜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차량을 몰고 온 이 청년은 38구경 리볼버 권총과 산탄총(샷건)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게에서 보낸 시간은 20여분. 그는 체념한 듯 총기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출동한 경찰에 체포된 그는 곧바로 구금됐고, 이후 징역 4년 형과 3년간의 보호 관찰을 선고받았다. 소총을 꺼내 들고 가게 안에 들어갔을 때 고객과 직원들이 혼비백산 건물 밖으로 도망쳐 인명 피해는 다행히 없었다.
‘진실 확인’보단 감정적 대응…급속히 확산한 ‘피자게이트’
판사는 "이 사건의 무모함은 숨이 멎을 정도"라면서 "순전히 운이 좋아서"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웰치는 뉴욕타임스(NYT)에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받는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며 성매매 조직에 의해 지하실에 감금된 아이들을 구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하실도, 갇힌 아이들도 없었다. 웰치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했지만, '피자게이트' 자체가 완전히 허구라는 점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피자게이트'는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이 맞붙었던 2016년 미 대선 기간에 등장한 악성 음모론이다. 폭로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대선 당시 클린턴 캠프의 선거대책본부장이었던 존 포데스카의 이메일을 해킹한 뒤 내용을 공개하면서 불거졌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일부 사용자들은 이메일에 등장했던 '피자'나 '치즈피자'와 같은 단어가 아동 성매매와 관련된 은어라고 주장했다. 워싱턴D.C의 피자 가게가 아동 성매매 조직의 본거지라는 주장이 뒤따랐는데 가게 주인이 민주당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 근거가 됐다. 이 주장은 쏜 화살처럼 웹사이트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져나갔다.
클린턴을 싫어하는 유권자들의 정치적 반감과 아동 성매매라는 자극적인 소재가 결합하자 어처구니없는 루머는 위력을 얻었다. 사람들은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보단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웰치의 사건은 객관적인 사실보다 개인의 믿음과 감정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탈진실(Post-truth) 시대에 가짜뉴스가 사회적 불신과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학계에서 많이 인용된다.
‘피자게이트’는 종교와 유사한 음모론 집단 ‘큐어넌’ 낳아
'피자게이트'는 한바탕 소동으로 끝나지 않았다. '큐어넌(QAnon)'이란 더 광범위하고 정교한 음모론 혹은 음모론 신봉자 집단이 2017년 가을 무렵 등장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출범한 해였다. 큐어넌에서 'Q'는 인터넷 게시판에 암호를 남기는 미스터리한 인물을, '어넌'은 익명(Anonymous)을 뜻한다.
큐어넌의 세계관은 '피자게이트'의 확장판이다. 정치인과 할리우드 배우, 고위 공무원 등 미국의 '딥스테이트(Deep State)'가 사탄을 숭배하고 아동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비밀 조직을 구성해 나라를 통제하고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큐어넌은 "오물을 청소하라!"며 워싱턴 정치의 부패와 기득권층을 비판하고 백악관의 주인이 된 트럼프와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이들은 트럼프가 '딥스테이트'에 맞서 싸우고 있는 유일한 영웅이라고 주장한다. '폭풍(The Storm)'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체포와 심판의 날에 트럼프가 '딥스테이트'를 체포해 처형할 것이라고 믿는다. 큐어넌에게 트럼프는 '메시아'와 같다.
큐어넌은 세상을 '선한 세력(트럼프와 추종자들)'과 '사악한 세력(딥스테이트)'의 대결로 본다. 이 같은 이분법적 구조는 대다수 종교의 세계관과 유사할 뿐 아니라 포퓰리즘 정치 구조와도 닮았다. 트럼프가 등장하는 정치행사가 종교적 색채를 띠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큐어넌은 트럼프의 정치 구호이자 지지자들을 일컫는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토대 위에 뿌리를 내렸다. 반기득권 정서와 트럼프에 대한 충성은 공유된 가치였다. 큐어넌은 마가 운동에 세계관을 제공했고, 마가 지지자들을 더욱 결집하는 역할을 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들 음모론 신봉자는 트럼프의 집회에 'Q' 로고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참석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2021년 1월 미국 국회의사당 난입 사건 가담자 상당수는 큐어넌이었다. 이들을 '듣보잡'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미국 여론조사기관인 공공종교연구소(PRRI)의 2024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약 19%가 큐어넌 음모론의 핵심 주장을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저서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한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최근 퍼슈에이션 기고문에서 "오늘날, 음모론은 더 이상 특정 우파 괴짜들의 극단적인 집착이 아니다"라며 미국 보수주의의 핵심적인 정체성이 됐다고 평가했다.
음모론 서사를 완성하는 '엡스타인 파일'
미국의 억만장자 금융가 제프리 엡스타인이 미성년자를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르고 성매매 인신매매 조직을 운영한 대규모 스캔들은 큐어넌을 포함한 트럼프 핵심 지지층에서 폭발적인 파장을 낳았다. 엡스타인 파일은 큐어넌 음모론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부패한 엘리트들'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날 뿐 아니라 트럼프가 이들을 응징할 것으로 기대가 컸다.
트럼프는 이를 이용했다. 그는 지난해 대선 유세 때 "딥스테이트"의 음모론을 부각하면서 엡스타인 파일 공개를 약속했다. 이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유일한 영웅으로 트럼프를 포장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 취임 후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엡스타인 파일 추가 공개를 거부했다. 팸 본디 법무장관은 추가 문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고객 명단"은 없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트럼프는 핵심 지지층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지난 7월 중순, 극우 방송인 찰리 커크와 마가 운동의 핵심 이념을 설계한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 전략가는 플로리다에서 열린 청년 정치행사에서 참석자들에게 "엡스타인 파일이 당신에게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손을 들라"고 요청했다. 참석자 거의 전체가 손을 들었고, 일부는 두 손을 들기도 했다.
미국 언론들도 '엡스타인 파문' 보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달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복수의 행정부 고위 관계자를 인용해, 팸 본디 법무장관이 엡스타인 관련 문서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트럼프의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했다는 사실을 지난 5월 트럼프에게 직접 보고했다고 보도했는데 백악관은 "가짜뉴스"라고 대응했다.
워싱턴 정가에선 '엡스타인 파일'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관심이 뜨겁다. 저서 '화염과 분노(2018년)'로 유명한 마이클 울프는 최근 팟캐스트에서 트럼프가 뉴욕시 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선출돼 파란을 일으킨 무슬림 조란 맘다니를 공격하고, 워싱턴D.C에 주 방위군을 보내기로 한 결정은 '엡스타인 파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전환하기 위한 것이라고 봤다. 그는 알래스카 미러 정상회담 역시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엡스타인 파문'은 트럼프 핵심 지지층 일부가 트럼프에 처음으로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파장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엡스타인 파일이 트럼프를 상당 기간 괴롭히겠지만 그를 몰락시키진 못할 것으로 대다수 전문가는 보고 있다. 대부분의 지지층은 트럼프를 비판하기보다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서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트럼프 핵심 지지층은 그의 음모론에 너무 깊이 몰입돼 있어서, 이제 와서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단순히 '트럼프 지지는 잘못된 판단이었어'와 같이 실수를 인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문제가 된다는 진단이다. 음모론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단 것이다. "모든 국가는 그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고 했다. 정부는 국민의 거울이란 의미다. 미국의 민주주의 위기는 유권자 위기에서 비롯된 측면도 크다. 미몽(迷夢)에서 깨어나려면 한참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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