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TODAY] 태국-캄보디아 지도 전쟁…분수령 해석이 불러온 국경 충돌

(서울=뉴스1) 김종호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국경은 본래부터 명확히 고정된 선이 아니었다. 험준한 산맥과 복잡한 강줄기가 구획을 나누었지만, 수많은 소수 종족과 민족집단이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 살아왔기에 경계는 유연하고 생활권은 겹쳐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제국주의 세력의 진출 혹은 침략은 이 '흐릿한 경계'를 인위적으로 확정 짓는 과정이었다. 지난 시기 학계와 언론, 대중들에게는동남아시아와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가 연결되는 광대한 고지대가 자주 주목받아 왔지만, 말레이시아, 태국, 캄보디아 동남부 역시 경계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다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을 뿐이다. 남부 분쟁의 기원은 상당 부분 19세기 후반~20세기 초, 프랑스와 영국이 남긴 경계 설정의 유산이다. 프랑스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영국은 버마(현 미얀마)와 말레이반도를 점령한 상태에서 시암왕국(태국의 전신) 을 정치·경제적으로 압박했고, 불평등 조약을 체결해 국경선을 임의로 확정했다.
이 가운데 1907년 프랑스-시암 조약은 캄보디아·라오스와 시암의 국경선을 확정했으며, 1909년 영국-시암 조약은 태국과 말레이시아(당시 영국령)의 국경을 획정했다. 오늘날 태국·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라오스 국경의 주요 틀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최근 전쟁으로까지 번진 태국-캄보디아 간의 분쟁도 이 조약에서 비롯되었다.
1907년 3월 23일, 프랑스-시암 조약은 당시 시암이 실질 지배하던 바탐방(Battambang), 씨엠립(Siem Reap), 시소폰(Sisophon) 등 3개 주를 프랑스에 할양하는 대신, 단사이(Dan Sai), 크랏(Krat) 등 일부 영토와 코쿳(Koh Kut)섬 등을 양도받는 내용이었다. 즉 이 조약을 계기로 현 캄보디아 서부 세 개의 주가 캄보디아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특히 시엠립은 캄보디아의 정신적 지주인 앙코르와트가 위치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조약에는 "양 당사자는 본 조약의 정확한 경계를 확정할 위원회를 설치한다"는 조항이 있었으며, '분수령(watershed)'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주요 산등성이와 수계를 경계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명시했다. 특히 남쪽의 코쿳섬 최고점을 기점으로 육상 경계를 북동쪽으로 잇는 형태였다.
문제는 이 분수령에 대한 해석이었다. 조약 발효와 함께 구성된 경계획정위원회는 프랑스 주도로 지도를 제작했는데, 1907년 파리에서 만든 1:200000 지도에는 프레아비히어 사원이 캄보디아 측에 포함됐다. 그러나 1930년대 태국이 시암왕국 체제로부터 태국으로 근대화하면서 제작한 지도나 1950~60년대 태국이 미군과 함께 만든 1:50000의 정밀 지도를 통해 해당 사원이 산등성이 절벽을 기준으로 분수령 북쪽에 위치해 있기에 태국 영토로 표시되었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즉, 엄밀히 조약을 따르면, 해당 사원은 당시 시암왕국의 영토가 되어야 했지만, 프랑스의 의도적, 혹은 비의도적 누락으로 캄보디아 영토가 된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해 당시 시암왕국은 당시 프랑스 측 지도에 대해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907년 조약 체결 당시에는 몰라서 그랬을 것이고, 1930년대에는 아마도 훗날 후손들이 이 문제로 전쟁을 벌이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까지 이어진 이 '긴 침묵'은 국제사법재판소(ICJ)가 훗날 '묵시적 승인'의 증거로 삼는 근거가 됐다.
사실 국경 자체가 추상적이었고, 2차 대전 전후와 냉전기에 영유권 주장은 수시로 변동했다. 특히 프레아비히어 사원 주변은 반복적으로 군사적 충돌과 정치적 논란의 중심이 됐다. 현재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1:200000 지도를, 태국은 1:50000 지도를 각각 근거로 삼아 자기 땅이라고 주장한다. 프레아비히어 사원은 11~12세기 크메르 제국의 힌두사원으로, 당렉 산맥 절벽 위에 자리한다. 그렇기에 문화· 역사적으로 크메르인의 자산이라는 것에 반대할 이는 없겠지만, 지형적으로는 태국 쪽에서만 접근이 가능하기에 애매하다. 지금은 캄보디아가 절벽에 길을내어다닐 수 있게는 되어있다고 하지만, 실제 사원의 정문이자 메인 계단은 태국에서만 접근이 가능하다.
1959년 캄보디아는 이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고, 1962년 판결에서 재판소는 태국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명시한 것처럼 지난 50년 동안 별다른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기에 묵시적 인정으로 본다는 논리로 해당 사원이 캄보디아에 속한다고 판시하면서 태국군 철수와 반환명령까지 내렸다. 그러나 태국은 판결을 공식 인정하지 않고 사실상 보류·무시 상태를 유지하면서 은연중에 분쟁 상태를 이어가는 두루뭉술 전략을 취한다.
사실 위성사진으로만 보면 조약상 프레아비히어 사원의 분수령 맥락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위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절벽이 분명히 드러나 분수령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사원은 절벽 가장자리에 길게 자리하고 있고, 주된 접근로는 북쪽 태국 측인 것도 분명하다. 다만, 1907년 조약 체결 이후 국경선 획정을 위한 프랑스 지도는 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고, 2008년 캄보디아의 유네스코 제출 지도는 행정경계를 캄보디아 쪽으로 보이도록 그렸다. 하지만 지형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태국이 지도의 정확성과 분수령 원칙을 근거로 버티면서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역사적, 문명사적으로 보면 프레아비히어나 국경을 따라 형성된 고대 사원군 모두 크메르인들의 자산이다. 다만, 제국이 국경선을 그을 때 그 부분이 크게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았고, 그어질 당시 힘의 논리를 따르다 보니, 지금 분쟁의 씨앗이 된 것이다. 이는 근대 시기 국제조약이 현대 국경분쟁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판가름 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케이스이자 민족주의, 정치지도자의 이해관계, 군부와 정치인의 권력 역학이 결합한 결과이기도 하다.
갈등이 본격적으로 폭발한 것은 2008년, 캄보디아가 프레아비히어 사원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하면서였다. 2008~2011년 양국은 무력 충돌을 벌였고, 사상자가 발생했다. 2011년 캄보디아는 국제사법재판소에 다시 '1962년 판결의 의미'를 명확히 해달라고 요청했다. 태국이 “판결은 사원에만 해당하고 주변 광대한 지역에는 효력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재판소는 임시조치로 분쟁지역 철수, 임시 비무장지대 설치, 군사행동 중단, 세계유산접근보장 등을 명령했다. 2013년 재판소는 사원이 캄보디아 영토임을 재확인했지만, 캄보디아의 요구처럼 광범위한 주변 구역까지 포함하지는 않았다. 효력은 사원과 부근에 국한되었다. 양국 및 국제사회에 유적 보호와 접근 보장을 주문했지만, 사실상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은 결론'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결정이었다.
그에 따라 이후에도 긴장은 계속됐다. 2020년대 들어서는 다른 접경 사원에서도 유사한 충돌이 반복되었고, 분쟁 지역 곳곳에 지뢰가 매설되었다. 그러다가 2025년 5월 28일, 충복(Chong Bok) 지역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캄보디아 병사 1명이 사망하면서 국경 긴장은 순식간에 고조됐다. 이후 양측은 군병력을 전면 증강하고, 검문소를 폐쇄하며 무역을 중단했다. 6월 18일에는 태국 총리 패통탄(탁신 전 총리의 딸)과 전 캄보디아 총리 훈센(현 총리의 부친)간의 전화통화 녹취가 유출되며 외교적 신뢰가 붕괴했고, 태국 총리는 직무가 정지됐다. 7월 24일에는 프레아비히어 사원 인근에서 대규모 교전이 발생해 공습과 포격, 전차까지 동원되었으며, 최소 38명이 사망하고 30만 명 이상이 피란했다. 불교 사찰과 마을 인근에도 포병이 배치되는 등 민간 피해가 크게 확대되었다. 물론 며칠 만에 휴전을 선포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분쟁의 불씨는 남아있고, 그사이에 다치거나 죽은 양측 민간인과 군인들의 억울함은 풀 길이 없다. 해당 국경지대에는 프레아비히어 사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번 전쟁의 직접적 계기가 된 '따므안똠'(Ta Muan Thom) 사원이나 '따꾸아이'(Ta Khwai) 사원 역시 여전히 분쟁의 요소로 위험 지대로 꼽힌다. 특히 크메르 제국 시기의 유산들인 이 사원들을 중심으로 태국과 캄보디아가 지뢰를 설치하거나 벙커를 세워 군사기지화한다는 주장이나 목격, 증언이 있어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 사태의 휴전은 말레이시아가 아세안 의장국으로서 중재를 주도하고, 미국과 중국이 동시에 관여하는 이례적인 구도로 성사됐다. 미국은 양측을 협상테이블로 복귀시키기 위해 관세 압박을 가했고, 중국은 중재에 동참해 양측이 체면을 잃지 않으면서 대화에 복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미국과 중국의 균형 있는 개입은 상호견제를 완화시키고, 아세안이 중심이 되는 다자 중재 구조를 가능하게 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합의가 어디까지나 '적대 행위의 중지'에 불과하며, 근본 원인 해결과는 거리가 있다고 평가한다.
태국의 경우 이번 분쟁이 군의 위상을 크게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여론조사에서 군에 대한 신뢰는 62.5%로, 탁신 일가가 이끌어온 정부(11.9%)를 크게 웃돌았다. 국방장관이 공석인 가운데 군은 위기관리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개혁 추진력은 약화했다. 캄보디아와 태국 모두에서 국경분쟁은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내부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종종 정치적 동원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실제로, 역사적 영토 분쟁과는 별개로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 중 하나로 2024년 태국과 캄보디아 간 해양가스전 공동개발 협약이 꼽히기도 한다. 이 협약은 태국 내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했을 뿐 아니라, 탁신 가문과 훈센 가문 간 정치엘리트 집단의 초국적 유착 가능성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탁신 전 총리의 딸인 태국 총리와 훈센 전 총리 사이의 친근한 통화가 그 의심을 촉발했고, 이는 군부에 개입 명분을 제공한 측면도 있다. 더불어 앞서 언급한 프랑스-시암조약에서 영해 경계가 모호하게 규정된 점은, 이번 공동개발이 영해 분쟁에서 태국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소문'이 확산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정치지도자에게 전쟁은 험악하게 시작했다가 웃으며 끝낼 수 있는 '게임'일지 모르지만, 민간인에게는 재앙이다. 그러니 당장 평행선을 그릴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실관계를 따지기보다 지속 가능한 평화를 위한 국제정치적 노력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국경 획정의 공식화, 군-군 직통 소통 채널과 완충지대 설치, 억류 병력의 송환, 교역·통행 재개 등 경제·사회적신뢰 회복 조치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국 국내 정치에서 국경분쟁이 여전히 정치적 자산으로 작동하는 한, 갈등이 '휴전 전용 상태'로 남아 주기적으로 재점화될 위험은 여전히 상존한다. 아세안 차원에서는 상설 중재 메커니즘과 육상국경 행동강령을 마련해 위기를 관리하고 재발을 방지해야 할 것이다. 이 수십 년의 분쟁사를 다시 폭력으로 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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