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휩쓰는 고립주의 물결…세계는 전전 시대로 퇴행

[트럼프 당선] 국가주의 부상, 높아진 장벽

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힐튼 미드타운에 모인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 '조용한 다수'가 트럼프를 지지한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등의 구호가 보인다. ⓒ AFP=뉴스1

(서울=뉴스1) 손미혜 기자 =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는 구호를 전면에 내세우며 '세계 최강국' 미국이 누린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호소는 그대로 유권자들의 표심으로 녹아들었다.

멕시코 국경장벽 설치, 무슬림 미국 입국 금지 등 반(反)이민 정서와 보호무역주의 등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외교·경제정책을 천명한 트럼프가 향후 4년간 세계 최강국 미국을 이끌어나갈 지도자로 낙점되면서, 전 세계는 또 한차례 민족주의, 신(新)고립주의의 폭풍을 맞게 됐다.

하버드대 사회학자 바트 보니코우스키와 뉴욕대 폴 디마지오는 "트럼프 캠프는 미국의 우월성, 엘리트의 도덕적 부패, 이민자를 비롯해 인종·민족·종교적 소수가 가하는 위협 등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면서 "트럼프의 인기는 민족주의적 정서를 수면 위로 끄집어냈다"고 평가했다.

트럼프는 출마 초기부터 이민자들이 범죄를 야기하고 '진정한' 미국인들에게 돌아가야 할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주장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이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브렉시트(Brexit)나 유럽의 극우정당 득세 현상과도 맞닿아 있다.

실제 지난 6월 영국이 브렉시트를 결정했을 당시 이번 국민투표가 트럼프 당선의 전조(前兆)가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엘리트층에 대한 분노와 국가주권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이민자·난민에 대한 적개심과 과장된 애국심,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적 공약 등 트럼프와 브렉시트 찬성론자 간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존재했다.

더불어 전례 없는 난민위기와 파리·브뤼셀 연쇄테러 등 안보불안을 배경으로 한 유럽의 '우회전'은 전면적인 현상이 됐다. 프랑스 극우 국민전선(FN)이나 오스트리아 자유당(FPOe) 등 비주류에 불과했던 극우 국가주의 정당들은 이제 중앙정치를 넘볼 만큼 성장세를 거듭했다.

독일 페기다(PEGIDA· 유럽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지지다들이 드레스덴에서 집회를 열고있다. ⓒAFP=뉴스1

나치를 경험한 독일에서 마저 민족주의를 둘러싼 '금기'는 이미 부서졌다. 반(反)이민 정서를 내세우며 등장한 신생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창설 3년 만에 16개 지방의회 중 10개 의회 의석을 확보하는 쾌재를 불렀으며 수도 베를린 진출에도 성공했다. 나아가 내년 가을 총선에서는 첫 연방의회 진출도 노릴 수 있는 상태다.

에릭 카우프만 런던대 버크백 칼리지 정치학 교수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민족주의발 정치적 혼란 기저에 정체성의 위기가 있다고 봤다. 그는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누구인가' 그리고 '이 국가를 구성하는 것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 세기 백인 중산층이 누려왔던 경제성장과 부는 둔화됐고, 이전 세대가 누려왔던 기회는 더이상 다음 세대에게 보장되지 않는다. 세계화와 자유무역은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켰고, 높은 실업률 속 이민자 유입과 다민족화는 국가를 타인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심어줬다.

이들의 관심은 무역적자, 이민자 범죄, 마약전쟁, 국경통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에 쏠렸고, 국가주의적 담화는 짙은 패배감을 느낀 이들의 심장을 쓰다듬었다.

카우프만 교수는 이에 따라 "중산층이 인종적, 국가주의적 정체성에서부터 출발한 이기심에 집착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모든 미국 대통령들이 초당파적으로 고수해왔던 '국제주의' 기조를 전면적으로 뒤엎고 국가주의를 채택함에 따라, 반세계화 기류에 힘입어 1·2차 세계대전 이전의 민족주의 국가(nation-state) 시대로 회귀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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