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 "3500억달러 투자약속 1년째 지연에 美불만 임계점 향해"
"韓정부, 사업성 따지며 신중…트럼프는 중간선거 앞두고 성과 원해"
"美, 한미 연합훈련 축소·이란 파병 압박 등 안보 현안까지 흔들"
- 강민경 기자
(서울=뉴스1) 강민경 기자 = 한국 정부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와 합의한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 약속이 1년 가까이 단 한 건도 이행되지 못하자 미국의 불만이 임계점에 달했다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상업적 타당성을 최우선에 둔 한국의 신중론과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가시적 전리품을 원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조급증이 충돌하면서, 통상 갈등이 한미 연합훈련 축소와 대이란 작전 지원 압박 등 안보 영역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한국은 지난해 미국의 25% 상호관세를 15%로 낮추는 대가로 조선업 1500억 달러, 전략 산업 2000억 달러 등 총 350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연간 지출 상한은 200억 달러로 묶었다.
반면 경쟁국 일본은 5500억 달러 투자를 약속한 뒤 연간 상한선 없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오하이오주 가스화력발전소 330억 달러, 테네시와 앨라배마주의 소형모듈원전(SMR) 최대 400억 달러 등 굵직한 프로젝트를 연이어 발표했다. 피터 나바로 백악관 통상고문이 일본의 합의를 두고 "사실상 백지수표"라고 반색했던 이유다.
일본의 속도전과 대조되면서 미국의 시선은 싸늘해지고 있다. 제니퍼 리 아시아그룹 파트너는 "일본의 연속적인 투자 발표와 비교해 한국의 진척이 더뎌 보이면서 미국 정부 내에서 상당한 불만이 쌓여 왔다"고 전했다.
워싱턴 사정에 밝은 한 소식통도 FT에 "한국이 서둘러 움직이지 않으면 트럼프 대통령의 격한 반발을 살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와 기업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텍사스 가스발전이나 원전 투자설이 돌았으나 청와대는 "구체적인 투자처와 발표 시기, 1차 송금액과 시기 모두 확정된 바 없다"며 선을 그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대국민 설명회에서 대미 투자가 "오직 상업적으로 타당한 프로젝트에만 집행될 것"이라고 못 박은 바 있다.
민정훈 국립외교원 교수는 "기업들은 타당성이 없으면 투자하지 않는다. 한국은 신중할 수밖에 없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빠른 진전을 원해 양측 입장이 크게 다르다"고 지적했다.
특히 지난해 9월 미국 이민 당국이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을 기습 단속한 사건 이후 한국 기업들은 대미 투자에 상당히 주저하게 됐다고 FT는 짚었다.
미국은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에 첨단 메모리 반도체 생산시설 투자를 거세게 압박하고 있다. 대규모 국내 투자를 진행 중인 반도체 업계에는 치명적인 부담이다.
다만 미국의 상선 건조 점유율이 0.2%에 불과한 상황에서, 세계 2위 조선 강국인 한국의 조선업 기술력은 유일한 협상 지렛대로 꼽힌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시간은 많지 않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FT에 "트럼프의 관점에서는 중간선거 캠페인에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대미 투자가 반드시 실현돼야 한다"고 말했다.
조바심이 난 트럼프 행정부는 안보 카드를 꺼내 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한미 연합훈련인 '을지 자유의 방패(UFS)' 규모 축소를 전격 지시했다. 다음 날에는 "우리는 김정은으로부터 당신들을 지키기 위해 3만 9000명(실제로는 2만 8500명)의 군인을 주둔시키고 있는데, 당신들은 이란에서의 아주 쉬운 군사 작전에 우리를 돕지 않으려 한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렸다.
이란 외무부가 한국의 호르무즈 해협 작전 참여에 "심각한 결과가 따를 것"이라고 경고한 가운데, 정부의 고심은 깊어지고 있다.
트로이 스탠거론 한미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FT 인터뷰에서 "파병 발표가 투자 문제에서 한국에 어떤 여유나 재량권을 줄 가능성은 낮다"며 "한국이 초기 투자 프로젝트를 서둘러 발표하지 않으면 합의 이행을 회피하려 한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향후 한국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 도입 합의를 뒤집거나 주한미군 감축 위협을 다시 꺼낼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라몬 파체코 파르도 킹스칼리지 런던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과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거래적 접근법의 승리로 내세울 수 있는 대규모 투자를 원하고 있다"며 "동맹에 대한 트럼프의 시각을 고려할 때, 그가 재임하는 한 한미 관계는 계속해서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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