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대사관저의 불이 꺼지지 않으려면

정은지 베이징 특파원. ⓒ 뉴스1

(베이징=뉴스1) 정은지 특파원 = "대사관저는 우리 문화를 알릴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런 만큼 관저의 활용도를 더욱 높여 나갈 생각입니다."

이달 초 베이징특파원단과 만난 노재헌 주중대사의 말처럼 대사관저는 더 이상 외교 행사를 위한 폐쇄적 공간을 벗어나 얼어붙었던 한중 관계를 녹이고, 양국 간 거리를 좁히며, 재중 교민 사회와 소통하는 공공외교의 무대로 변모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관저에서 열린 '한·중 청년 기업가 관저 포럼'이 대표적 사례다. 당시 한국 측에선 허진홍 GS건설 부사장, 이규호 코오롱그룹 부회장, 담서원 오리온 부사장, 전병우 삼양라운드스퀘어 전략기획본부장 겸 삼양식품 최고운영책임자(COO) 등 재계 3~4세가, 중국 측에선 린찬 바이트댄스 최고사업책임자(CBO), 정지하오 펑페이그룹 부사장, 류젠 헝쿵그룹 부총재 등이 각각 참석했다. 양국의 차세대 경제인들이 격식보다 교류에 방점을 두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 것은 최근 한중 관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관저는 최근 가장 분주한 외교 공간 가운데 하나가 됐다.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관저에서 열린 행사는 26차례에 달한다. 평균 주 1회씩 관저에서 행사가 열렸단 얘기다. 청년 기업가 포럼뿐 아니라 음악회, 외교단 초청 오찬, 어린이날 개방 행사 등 주제도 다양하다. 정재호 전 대사 재임 시절인 2023년 한 해 동안 열린 관저 행사가 38회였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변화다.

관저 안에서만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 대사 부임 이후 주중대사관의 움직임도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대사관 홈페이지에 공개된 공관장 활동만 올해 들어 60건에 이른다. 중국 중앙정부 인사들과의 면담은 물론 장쑤성, 허베이성, 랴오닝성 등 지방정부 고위급 인사들과의 접촉도 늘었다. 싱크탱크와 언론, 경제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공공외교 활동도 활발하다. 공개되지 않은 일정까지 감안하면 실제 활동 규모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움직임이 주목받는 이유는 재외공관이 국가 외교의 최전선에 서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재외공관을 통해 정부 당국자와 기업인, 학계와 언론, 교민 사회와 외교단을 끊임없이 접촉하며 관계를 관리한다.

특히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자 미국과 함께 세계 질서를 좌우하는 G2 국가로 대사관의 역량은 양국 관계의 실제 온도를 결정한다.

최근 양국 관계의 분위기는 수치로 확인할 수 있다. 주중대사관에 따르면 올해 1~5월 중국인 대상 비자 발급 건수는 68만1000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5% 증가했다. 이에 따른 비자 발급 수입은 연간 수백억원 규모로 추산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런 흐름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 주요 인사들과의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외교네트워크구축비 2021년과 비교해 60% 가까이 줄어든 것으로 전해진다. 각종 행사 개최 예산 역시 큰 폭으로 감소했다. 보통 예산이 전년 예산을 기준으로 편성되는 것을 감안하면, '불통의 아이콘'으로 통했던 정재호 전임 대사의 소극적 행보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올해 하반기 이전에 관련 예산 대부분이 소진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그렇다고 대사관이 과하게 예산을 집행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늘어난 외교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면담이나 활동을 조절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달 어린이날을 맞아 열린 관저 개방 행사도 빠듯한 대사관 살림 탓에 교민 사회와 중국 진출 기업들이 힘을 보태며 치러졌다.

한 소식통은 "코로나19 등의 영향으로 공관 예산이 전반적으로 줄어든 데다 지난해에는 공관장 공석으로 인해 외교 활동비를 충분히 집행하지 못하면서 불용 예산이 발생했고, 이것이 올해 예산 삭감으로 이어진 측면도 있다"며 "결국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재외공관 예산을 무조건 늘리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어렵게 형성된 한중 관계 개선의 흐름이 예산 문제로 제동이 걸리는 상황은 경계하자는 것이다.

외교의 성과는 기업 실적처럼 분기마다 숫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예산이 당장 줄어들었다 하더라도 눈에 띄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관계는 유지할 때보다 끊어졌을 때 더 큰 비용이 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외교관들의 책임감도 중요하다. 넓어진 인맥과 늘어난 접촉이 단순한 행사 실적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외교관은 사람을 만나고 이를 국익으로 연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지킬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상황 판단도 있어야 한다.

관저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고, 그 불이 국익으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일이야말로 지금 주중대사관, 특히 노재헌 대사가 함께 짊어져야 할 과제다.

ejjung@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