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암흑 유조선' 급증…"원유 공급량 전쟁 전 60% 회복"

닛케이 "위치정보 끄고 해협 통과…하루 936만배럴 수송"
사우디·이라크 해상 환적 확대…유조선 운임 5.7배 급등

걸프만의 유조선. <자료사진> ⓒ 로이터=뉴스1

(서울=뉴스1) 장용석 기자 = 이란이 사실상 봉쇄하고 있는 호르무즈 해협에서 위치정보를 끄고 운항하는 이른바 '암흑 유조선'(dark tanker)이 급증하면서 원유 공급량이 미국·이란 군사 충돌 이전의 60% 수준까지 회복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28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유럽 원자재 정보업체 케이플러가 선박자동식별장치(AIS)를 끈 유조선의 적재량까지 추산한 결과, 이달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것으로 추정되는 원유는 하루 936만 배럴에 달했다.

이는 지난 8월보다 하루 356만 배럴 증가한 것으로서 올 2월 말 이란 전쟁이 시작된 이후 최대 규모다. 전쟁 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던 하루 약 1500만 배럴의 60%를 웃도는 수준이란 게 닛케이의 설명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석유 공급량의 약 20%가 통과하던 핵심 원유 수송로다. 이란은 올 2월 미·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에 돌입한 이래 각국 유조선 등 선박의 호르무즈 해협 통항을 제한해 왔다.

이후 7월부턴 홍해 우회 항로에서도 예멘 후티 반군 등 친이란 세력의 유조선 공격이 늘었고, 이달 초엔 사우디아라비아의 동서 송유관까지 공격 받아 가동이 중단되면서 유럽행 원유 선적이 취소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닛케이는 "그럼에도 국제유가는 전쟁 초기에 우려했던 배럴당 150달러 수준까지 치솟지 않고 있다"며 "시장에선 AIS를 끈 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유조선 증가가 원유 공급을 떠받치면서 가격 상승을 억제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은 지난 25일 배럴당 91~95달러 선에서 거래됐다. 이는 이란 전쟁 개전 이후 기록한 고점인 119달러대보다 약 20% 낮고, 2008년 기록한 사상 최고치 147.27달러에도 크게 못 미치는 것이다.

국제 항로를 운항하는 선박은 충돌 방지와 항행 관제를 위해 국제해사기구(IMO) 규정에 따라 원칙적으로 AIS 위치 신호를 송출해야 한다. 그러나 선박 안전에 위협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긴급조치로서 이 장치를 끌 수 있다.

닛케이는 "AIS를 끄면 이란 측이 선박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워져 드론 공격이나 나포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케이플러 측은 이외에도 "호르무즈 해협을 빠져나온 뒤 오만만 등에서 아시아행 유조선으로 원유를 옮겨 싣는 선박 간 환적(STS)도 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사우디와 이라크가 이런 방식으로 원유 수송을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실제 사우디는 이란 전쟁 개전 이후 홍해 방면을 통한 우회 수출을 늘려왔으나, 이 항로에 대한 후티 반군의 공격이 잇따르면서 다시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수출 확대에 나서고 있다.

영국 원자재 가격정보업체 아거스미디어에 따르면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는 올 9~11월 오만 앞바다에서 해상 환적을 거쳐 원유를 인도하는 현물 계약 입찰을 시작했다.

닛케이는 사우디가 그간 월별 공식 판매가격(OSP)에 따른 장기계약을 중심으로 원유를 판매해 왔단 점에서 이번 입찰은 "이례적"이라며 "호르무즈 해협 바깥 오만 인근 해상에서 원유를 인도할 경우 해협 진입을 꺼리는 유조선도 물량을 받을 수 있다"고 부연했다.

이라크 역시 원유 수출의 돌파구를 찾고 있는 모습이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자료를 보면 페르시아만 안쪽에 위치한 이라크의 올 5월 원유 생산량은 2월보다 60% 감소한 하루 260만 배럴까지 떨어졌다. 이라크는 올 2월 말 미국·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이란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원유 수출의 90% 이상을 호르무즈 해협에 의존해 왔다.

이라크는 시리아·튀르키예를 거치는 송유관 건설을 추진하고 있지만 당장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하지 않고선 대규모 수출이 어려운 상황. 이에 이라크는 올 8월 이후 자국 연안까지 원유를 인수하러 오는 구매자에게 배럴당 20~30달러를 할인해 판매하며 고객 확보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암흑 유조선'을 활용한 원유 수송은 복잡한 해상 환적과 장거리 우회를 거쳐야 하기에 운송비 부담은 크게 늘어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런던증권거래소그룹(LSEG)에 따르면 중동과 극동을 오가는 재화중량 약 30만 톤급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의 하루 용선료는 이달 24일 기준으로 123만 달러(약 16억 7000만 원)까지 치솟았다. 이는 2월 말보다 5.7배 높은 수준이다.

게다가 호르무즈 해협 일대 혼란이 장기화하면서 높은 유가가 일상화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달 초 HSBC는 브렌트유 평균 가격 전망치를 올 4분기 배럴당 95달러, 내년엔 85달러로 종전보다 20~25달러씩 상향 조정했다.

이와 관련 HSBC 측은 호르무즈 해협의 혼란이 반영된 배럴당 80~90달러대 유가가 이란 전쟁 전과 다른 '뉴노멀'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ys4174@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