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벵가지 사태?…이라크 美대사관 습격에 중동 '일촉즉발'
이라크 정부, 대사관 공격 사실상 묵인 의혹도
이라크 내 반미 기류 확산…美-이란 대리전 우려 고조
- 한상희 기자
(서울=뉴스1) 한상희 기자 = 31일(현지시간) 이라크 친이란 시위대가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관을 사실상 '습격'하면서 미국과 이란, 그리고 미국과 이라크 관계가 한층 복잡해지게 됐다.
뉴욕타임스(NYT)와 알자지라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시위대는 이날 오전 미 대사관에 모여 돌을 던지고 외벽을 불태우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미군이 지난달 29일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 군사기지 5곳을 공습해 25명이 사망하자 분노한 무장대원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미국은 이날 대사관 상공에 공격 헬기인 아파치 헬기 2대를 띄우고 쿠웨이트에 주둔 중인 해병대 100명을 긴급 파병했다.
이튿날에는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이 직접 성명을 내고 이라크에 수일 내에 병력 수백명을 추가 파병하겠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일단 82공수사단 신속대응부대 병력 750명 배치를 승인하고, 최대 4000명의 병력을 이라크에 추가 배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이처럼 강경 대응에 나선 데는 '벵가지 사태'가 재연될 것에 대한 우려가 작용했다. 벵가지 사태는 지난 2012년 리비아 동부 벵가지에서 무장 시위대가 무슬림 모독을 이유로 미 영사관을 공격, 리비아 주재 미국대사와 직원 3명이 목숨을 잃었던 사건이다.
이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 참사로 기록되고 있다. 또 2016년 대통령 선거 때 사태가 일어날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의 최대 약점으로 꼽혔다. 대선 후보 시절 도널드 트럼프는 이 사건을 전면으로 내세우며 클린턴을 공격했다. 그랬던 만큼 이번엔 즉각적인 대응에 나서 오바마 행정부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오는 11월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새로운 외교 정책 과제가 생겼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민주당 의원들은 이날 사태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의 이란 정책의 실패"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근원을 따져보면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합의(JCPOA)을 파기해 벌어진 사태라는 애기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중동 정세는 한층 더 긴장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이날 시위의 배후에 이란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 이날 시위 현장에는 이라크 시민들뿐 아니라 이란의 지원을 받는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미국이 최대 4000명의 병력을 추가 투입할 수 있음을 시사하면서 앙숙인 이란과 미국이 이라크에서 대리전을 벌일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번 시위가 아니더라도 두 나라는 이라크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놓고 경쟁을 벌여 왔다. 미국은 막대한 금액을 투입해 이라크 전쟁 이후 시민들의 마음을 잡으려 애썼지만, 수니파였던 사담 후세인 정권이 2013년 붕괴한 이후 이라크 정치권은 사실상 시아파가 주도하고 있는 이란이 장악한 상태다.
이 때문에 이라크도 겉으론 미국에 협조를 약속했지만, 사실상 대사관 공격을 묵인했다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친이란 시위대가 평소 엄격하게 출입이 제한돼 있는 안전지대 그린존 검문소를 별다른 제지없이 통과했다는 이유에서다. 게다가 이라크 보안군은 소요 사태 하루가 지나서까지 대사관 앞에 텐트를 치고 무기한 농성에 돌입한 강성 시위대 1000여명을 진압하지 않고 있다.
미국과 이란 사이에 낀 이라크는 붕괴 직전이다. 이라크는 지난 10월1월부터 계속된 반정부 시위에 정치적으로 마비된 상태다. 대통령은 사퇴했고 시위 진압 과정에서 최소 485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혼란한 상황에서는 이란과 미국 간 대치 상황을 다룰 능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반정부·반이란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이라크 내 여론엔 반미 정서까지 확산되는 분위기다.
알자지라는 "미 대사관 폭동은 이라크인들이 자국 내 미국의 영향력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미국은 이라크 국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침략과 점령 16년 만에 이라크에 수조달러를 쏟아 부었으나 결국 대사관이 포위됐다"고 전했다.
NYT도 "미국이 이라크에 수년간 군사적 정치적 투자를 했지만, 미국의 역할을 지지하는 이라크인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지적했다.
다만 이날 대사관 공격은 반정부 시위대와는 결을 달리한다고 봐야 한다. 반정부 시위대는 △부패 근절 △공공서비스 문제 해결 △고용 기회 확대 △이란 개입 배제 등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대사관 습격 세력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이라크 정치 엘리트를 지지하고 있다.
미 대사관 공격 당일 바그다드 타흐리르 광장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 참가자들도 대사관 공격을 야기한 미군 공습을 비난하면서도, 폭력 시위 세력과는 거리를 뒀다.
이날 시위 현장에서 만난 누르 알 아르자이(30)는 알자지라에 "그린존(미 대사관) 시위자들은 우리를 대표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배격하는 시아파 정당에 속해 있고, 그들을 대표한다"고 말했다.
또다른 시위 참가자 알리 카라이비(27)도 "우리는 평화적인 시위 운동의 중심지에 머물고 있다. 그린존에 모인 군중은 우리를 대표하지 않는다. 우리는 평화로운 변화를 원한다"고 했다.
angela0204@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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