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델라타계] 만델라의 세 부인…"사랑 곁에서 잠들다"
- 최동순 기자
(서울=뉴스1) 최동순 기자 =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이 5일(현지시간) 타계했다.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종신형을 받은 '내란범'이기도 했고 한 국가의 대통령이자 세계적인 인권운동가이기도 했다.
그의 삶만큼이나 파란만장했던 것이 그의 결혼생활이다. 그는 두 번의 이혼을 하며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지만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이의 품에서 생을 마감했다.
◇ '조용한 소녀' 에블린
만델라의 첫 번재 부인 에블린 은코토 마세는 정치에 관심 없는 시골 간호사였다. 그는 만델라와 같은 트란스케이 출신으로 친구인 월터 시술루의 사촌이었다. 만델라와 에블린은 소웨토에 있는 시술루의 집에서 1944년 처음 만났다.
둘은 만난지 몇 달 되지 않아 결혼했다. 만델라가 시술루, 올리버 탐보와 함께 아프리카민족회의에 가입해 청년동맹을 결성하던 해였다. 만델라의 반 아파르테이트 정치·인권운동에 본격화 되고 있었다.
신혼 첫 해, 그들은 집안일도 서로 도와가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만델라가 정치에 점차 몰두하면서 관계는 소원해졌다. 에블린은 정치적 중립이 강요되는 '여호와의 증인'에 빠져들었다.
1956년 만델라가 반역죄로 처음 체포되고 보석으로 풀려나 귀가했을 때, 만델라를 반긴 것은 두 딸뿐이었다. 에블린은 이미 집을 나갔다. 둘은 1957년 이혼했다. 결혼 13년만이었다. 에블린은 고향 트란스케이로 돌아가 가게를 운영하다 1998년 재혼했다. 둘은 2남 2녀를 뒀다. 셋은 만델라보다 먼저 세상을 떴고 살아있는 사람은 큰딸 마카지웨뿐이다.
◇ '급진 운동가' 위니
만델라가 두 번째 부인 위니(놈자모 위니프레드 마디키젤라)를 알게 된 것은 그가 두 번째로 체포돼 재판을 받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그들은 1958년 6월에 결혼했다. 두 딸을 낳았다.
위니는 첫 번재 부인 에블린과 달리 정치에 활발히 참여했다. 하지만 그의 정치활동은 다소 급진적이었고, 기본적으로 '비폭력운동'을 지향했던 만델라와는 맞지 않았다. 젊은 남자와 바람을 핀다거나 뇌물 수수를 했다는 의혹도 끊이지 않았다.
위니는 결혼 직후 거리에서 군중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는데, 그때 만델라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아무래도 결혼을 잘못한 것 같다”
예언같은 말이었다. 만델라의 면회가 금지되기 전까지 둘은 지속적으로 만났지만, 둘의 관계는 어느덧 소원해지고 있었다.
위니는 1969년 그녀는 테러혐의로 13개월간 독방에 수감됐고, 1973년에도 6개월을 복역했다. 1976년 남아공 '학생혁명' 당시에는 경찰에 주동자로 지목됐다. 5개월을 복역했고 브랜드포트로 7년간 추방당했다.
위니는 추방기간을 끝내고 소웨토로 돌아와서도 반아파르헤이트 운동을 계속했다.
1986년에는 흑인거주지역에 반 아파르헤이트 운동을 배신한 사람들이 산 채로 불타죽는 일이 발생했는데 위니가 배후로 지목됐다. 그는 "남아공 흑인들이 우리의 성냥갑으로 인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위니는 '만델라연합축구클럽'이라는 폭력배 무리를 이끄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 클럽은 그녀의 '경호부대'라 여겨졌는데 성향이 매우 폭력적이었다. 결국 클럽은 14세의 어린 운동가 스톰피 세페이를 칼로 찔러 죽인 혐의로 기소됐다. 위니가 직접 소년을 찔른 것을 봤다는 증언도 있었다.
1990년 석방된 만델라는 그녀가 세페이 납치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을 때까지 그녀 곁을 지켰고 92년에야 별거를 시작했다. 1994년 만델라는 남아공 대통령에 당선됐다. 위니는 만델라정부의 차관으로 임명됐었으나,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곧 해고됐다. 둘은 1996년에 이혼했다.
순탄치 않은 결혼생활을 했던 만델라에게도 운명의 연인이 찾아왔다. 그는 후에 이런 말을 한다. "내 삶은 아주 늦게야 꽃을 피웠다. 이 모든 것이 그라사가 베푼 사랑 덕분이다."
세 번째 부인 그라사 마셸은 모잠비크 대통령 사모라 마셸의 부인이자 모잠비크의 교육부장관이었다. 수감중이던 만델라는 1986년 모잠비크 대통령이 비행기 사고로 숨지자 홀로남은 그라사에게 위로의 편지를 쓴다. 비행기 사고는 인종차별주의자들에 의한 테러라는 의혹이 있었다.
둘이 처음으로 만난 것은 만델라가 석방된 1990년 모잠비크의 수도 마푸토에서였다. 그라사는 아직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 사이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2년뒤 만델라는 그녀의 의붓자식의 대부가 됐다. 1996년 짐바브웨 대통령 로버트 무가베의 결혼식에서 다시 만났을 때 만델라는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사별 이후 "두번 다시 대통령과는 결혼하지 않겠다"던 그라사의 다짐은 허물어졌다. 만델라의 80번째 생일날인 1998년 6월 18일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라사는 만델라보다 28살이 어렸다.
둘은 마지막까지 금슬이 좋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라사는 평소 "만델라를 존경한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만델라의 '연인' 그라사는 늘 그를 곁을 지켰고 병간호에도 헌신적이었다.
2013년 12월 5일. 넬슨 만델라는 그녀의 품에서 우리를 떠났다.
dosool@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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