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청부 살해 조직 검거 위해…3년 만에 변호사가 된 아내[이세별사]

30대 영국 여성, 범죄조직에 살해당한 남편 위해 법관련 공부 시작
스웨덴 마약 밀매 조직 연관 범죄…범인 종신형, 조직 윗선 추적 중

편집자주 ...국내를 비롯 세계 각국에서 벌어진 기묘하고 충격적인 사건을 소설처럼 정리해 전해드립니다. 현실보다 낯선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생각하지도 못한 사건이 많습니다. '기묘한 세상!' 세상에 이런 일이? 정말? 일어났습니다. 뉴스1은 이 세상 별 사건을 소개하는 '이세별사'를 싣습니다.

아내 데보라 헤이즈(36)와 사망한 남편 이선 칼슨(38) 출처=더선

(서울=뉴스1) 김학진 기자 = 남편이 총탄에 맞아 내 눈앞에서 쓰러진 2019년 크리스마스이브, 내 삶의 가장 큰 조각이 잘려 나간 그 순간 난 두 살배기 아들을 품에 안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살고 있던 런던 배터시의 조용한 골목가. 크리스마스 장식 불빛이 반짝이고 캐럴이 흘러나오던 그 평온한 겨울밤 갑작스레 울린 외마디 총성은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총기희생자의 아내 데보라 헤이즈(당시 32). 출처=더 선
남편이 범죄조직과 연루?…"그녀는 알지 못했다"

수사를 시작한지 한달여 뒤 경찰은 스웨덴 국적 청부살인범 아니스 헤미시이를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에서 체포했다. 영국 현지 경찰은 해당 사건을 '범죄 조직간의 이권다툼에 의한 보복범죄'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데보라 헤이즈(당시 32)에게 남아 있는 그날 밤의 기억은 쓰러진 남편(이선 칼슨, 34)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그리고 충격으로 바닥에 쓰러진 자기 모습뿐이었다.

그때까지 데보라는 남편이 어떤 위험한 세계와 맞닿아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수사 초기 경찰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조사가 계속될수록 '이선 칼슨'이라는 이름이 과거 여러 사건 기록에 등장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마약 밀수와 연관된 정황, 그가 운영하던 음악 레이블을 통해 오고 간 의심스러운 자금의 흔적, 범죄조직 인물들과의 관계까지 다양한 단서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경찰은 이러한 조각들을 바탕으로 사건의 배후와 검은돈의 흐름, 범행에 사용된 총기 반입 경로 등을 추적해 나갔다. 다만 남편이 그 세계에 실제로 얼마나 관여했는지, 혹은 단순히 이름만 오르내렸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데보라가 여태껏 알고 있던 남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에게 남편 이선은 가족을 아끼고 여행을 사랑하는 평범한 남편이었다. 경찰 수사에서 나온 '범죄조직 연루'라는 단어는 그녀에게 무척이나 낯설고 받아들이기 힘든 표현이었다.

CCTV에 포착된 청부살인 의뢰를 받은 남성. 출처=더선
사건 발생 1년뒤…판결 뒤로하고 이민 택한 희생자의 아내

남편이 쓰러지던 그 순간의 악몽 같은 기억은 오랜 시간 데보라를 어둠 속에 가두었다. 피 묻은 선물 상자, 아이가 움켜쥔 작은 봉투, 총성을 듣고 달려오던 가족들의 절망 섞인 표정까지. 잊으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장면들이 틈만 나면 되살아났다.

여전히 집 안 곳곳은 남편의 흔적으로 가득했고, 아빠를 찾는 아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의 심장은 내려앉고 있었다.

사건 발생 1년여 뒤인 2020년 11월 데보라는 결국 모든 것을 지우기 위해 고국을 떠났다. 스웨덴 국적의 청부살인범이 체포돼 재판이 열렸지만, 그녀는 법정에 앉아 있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피의자가 들고 있던 총의 모양과 발사 각도 그리고 총기 넘버, 남편이 쓰러지던 방향과 그의 표정, 그녀는 반복해서 그 장면이 담긴 영상과 보고서를 마주해야 했고, 그럴 때마다 당시 느꼈던 고통이 되살아나 그녀를 휘감았다.

홀로 떠안아야만 했던 괴로움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걸 잊기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자 눈을 감고 극단적인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더 큰 죄책감이 밀려왔다.

데보라는 알고 있었다. 세상을 떠난 남편의 억울함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사망한 남편 이선 칼슨(34)과 아내 데보라 헤이즈(당시 32). 출처=더선
수사는 제자리…법 공부 시작한 희생자의 아내

활동적이고 사람을 좋아하던 그녀의 성격도 점점 바뀌어가고 있었다. 말수는 줄어들었고, 지인들과의 연락도 점점 끊겨갔다. 또 야위어 가는 몸은 주변에서 건강을 걱정할 만큼 변해 있었다.

그럼에도 데보라는 하루에도 여러 번 변호사와 수사팀에 연락해 '남편 사건'의 진행 상황을 확인했다. 그녀는 범인이 거쳐 간 지역의 CCTV를 통해 동선 하나하나까지 일일이 찾아보며 사건을 분석하고 수사팀에 과정을 문의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아직 조사 중이다"

시간이 흘러도 수사는 제자리를 맴돌았고, 데보라는 홀로 과거에 갇혀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허탈함과 막막함은 마치 커다란 벽에 부딪힌 듯했다.

그녀는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고독한 감정을 돌파하기 위해선 지금과는 다른 접근법이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그녀는 2021년 법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法' 관계자들이 사용하는 문장과 법적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시작한 그녀의 노력은 점점 더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희생된 남편의 사건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고, 수사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결국 법의 언어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법을 공부하는 시간은 그녀가 버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되었고, 동시에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힘이 되어갔다.

그렇게 그녀가 익혀 나간 법률 지식은 처음엔 남편의 사건을 이해하는 데 쓰였고, 이후에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피해자들을 돕는 데까지 이어졌다.

자신의 고통을 이겨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 과정이었지만, 그녀는 조용히 다음 단계로의 스텝을 이어나갔다.

그로부터 정확히 2년 뒤인 2023년 두바이에 있는 국제 로펌의 사무실에 들어선 그녀는 이미 범죄·금융·국제 분쟁 등 복잡한 사건을 다루는 변호사가 돼 있었다.

총기희생자의 아내 데보라 헤이즈와 남편 이선 칼슨. 출처=더 선
"나는 살기 위해 법을 선택한 사람이다"

그녀가 자신에 대해 스스로를 설명할 때 쓰는 말은 하나였다.

법정에 서는 순간마다 데보라는 남편의 마지막 표정을 떠올린다고 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그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편 현지 영국 사건 전담 수사팀은 사건 이후 배후 조직을 추적해 왔다. 청부살인을 실행한 남성은 종신형을 받았지만, 그를 움직인 조직의 핵심 인물에 대한 수사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남성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남편을 잃은 여성이 스스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엄청난 도전을 시작해 새로운 길을 개척했고, 결국 이를 극복하며 다시 일어선 과정이 함께 담긴 스토리가 됐다.

항상 남편에게 기대 서 있던 그녀가 남편이 쓰러졌던 그 자리에서 함께 주저앉았다면 사건은 기록 속에 묻혔을 것이다. 하지만 데보라는 총성이 지나간 자리에서 멈춰 있지 않았고, 법을 배우고 법정에 서며 자신의 손으로 남편의 사건을 끝까지 마주했다.

지난 1차 판결은 데보라의 남편을 살해한 '청부살인범'에게 중형을 선고하며 마무리됐지만, 사건을 지시한 '커다란 축'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현재 영국과 스웨덴의 공조 수사가 이어지고 있으며, 두 조직 간 갈등의 흐름도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데보라는 언젠가 다시 이 사건을 법정에서 마주하게 될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순간을 대비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과거와 같은 '피해자의 아내'가 아닌 남편을 위한 변호사로서 그 자리에 설 것이다.

아름다웠던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을 한순간에 지워버린 그 총성과 그날의 고통은 앞으로도 오래 그녀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은 더 단단해진 그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었고, 이제 그녀는 또 다른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길 위에 서 있다.

현재 사건 수사팀은 배후 인물 특정에 집중하고 있으며, 데보라는 언젠가 열릴 추가 재판에서 남편의 진실을 직접 확인하겠다는 뜻을 굳힌 상태다.

khj80@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