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독재자 아들, 36년만 권력 되찾기…필리핀 정치의 민낯

"소수 가문이 정치 장악…필리핀은 가문 정치에 지배 당했다"
두테르테 대통령, 마르코스 시신 반환하는 등 가문 부활에 한몫

페르난디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지난달 20일 필리핀 바탄가스주 리파에서 열린 유세 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 로이터=뉴스1 ⓒ News1 원태성 기자

(서울=뉴스1) 원태성 기자 = 오는 9일 예정된 필리핀 대선에서 독재자 페르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이 당선을 향해 9부 능선을 넘은 것으로 보인다. 페르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후보의 지지율이 2위 후보와 격차가 큰 만큼 반전은 사실상 없어 보인다.

5일 후면 '피플 파워' 혁명으로 쫒겨난 독재자의 아들이 40년도 채 안돼 다시 말라카냥궁(필리핀 대통령 관저)을 차지하는 현실 같지 않은 일이 필리핀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독재자를 쫓아내도록 한 필리핀의 부정부패가 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란 평가가 나온다.

AFP통신은 4일(현지시간) 국민에게 쫓겨난 독재자의 아들이 어떻게 36년만에 아버지를 포함한 가문의 실추된 이미지 복권할 수 있었는지 파악하기 위해 필리핀 특유의 왕조 정치를 집중 조명했다.

필리핀 내 엘리트 집안들은 오랫동안 가난에 찌든 이 나라를 지배해 왔으며 여러 세대에 걸쳐 특혜를 나눠주거나 표를 사고 폭력에 의존하면서 권력의 자리를 고수해 왔다고 AFP는 전했다.

왕조 정치로 유명한 필리핀에서 마르코스 주니어의 승리 전망은 단순히 정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쫓겨난 가문이 행한 수십 년간 노력의 결과물이자 의도적인 집단 기억 왜곡의 결과물이라고 워싱턴포스트(WP)는 분석했다.

마르코스 주니어가 당선되는데 유권자의 대다수가 18세에서 40세 사이라는 사실도 도움이 됐지만, 이러한 결과는 경제와 정치 권력이 여전히 소수에게 집중된 필리핀 정치의 민낯을 드러낸다고 WP는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독재자 마르코스를 몰아내기 위해 1986년 국민들이 봉기를 일으킨 이후에도 필리핀 내 가문 정치는 더욱 공고해졌다고 분석했다.

마닐라에 위치한 드라살 대학 훌리오 티안키 교수는 "미국 식민지 시절부터 지금까지 약 319개 가문이 필리핀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며 "수십개 가문이 힘을 잃었지만 2019년 중간선거에서도 234개 가문이 의원직을 차지했다"고 말했다.

그는 "필리핀에서 영향력 있는 가문의 지위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지만 힘을 잃은 가문도 언제든 권력을 되찾을 수 있는 정치 시스템이 고착화되어 있다"며 마르코스 전 대통령 가문을 언급했다.

이 가문은 국민들에게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한 마르코스 대통령이 1989년 사망하고 난 뒤 정치적 기반의 거점인 일로코스 노테로 돌아와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발판 삼아 다시금 고위직에 가족 구성원들을 당선 시켰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지 3년만인 1992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그 이후로 많은 마르코스 가문들이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2016년 하와이 호놀룰루에 안치됐던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의 시신이 필리핀으로 반환됐다.ⓒ 로이터=뉴스1 ⓒ News1 원태성 기자

4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잃었던 권력을 조금씩 되찾아 온 마르코스 가문은 이번 대선에서 마르코스 주니어가 대통령직에 앉는 것을 눈앞에 두고 있다.

선거 유세 활동을 위해 필리핀 전역을 돌았던 마르코스 주니어는 '왕조 정치'에 대해 부인했지만 그의 가문 구성원 조차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필리핀 라오아그 시장 연임에 나선 마르코스 주니어의 사촌 마이클 마르코스 킨은 "우리 가문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필리핀의 고착화된 왕조 정치 덕분"이라며 "내가 만약 마르코스 가문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도 마르코스 가문의 부활에 한몫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2016년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하와이에 안치된 마르코스의 시신을 반환받아 마닐라에 있는 영웅 묘지에 안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역사를 재창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또한 그의 딸인 사라 두테르테가 많은 지지에도 부통령으로 출마하며 마르코스 주니어와 러닝메이트를 이룬 것도 그의 지지율 상승에 영향을 줬다고 WP는 전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 로이터=뉴스1 ⓒ News1 이서영 기자

한편 펄스 아시아'가 지난 2일 발표한 필리핀 대선 여론조사에서 마르코스 주니오 후보가 56%의 지지를 받아 1위를 유지했다. 여론 조사 2위 후보인 로브레도는 지난달 24%에서 23%로 지지율이 떨어졌다.

복싱 세계 챔핀언 출신인 매니 파퀴아오는 7%, 현 마닐라 시장인 프란시스코 도마고스는 4%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번 여론조사는 '펄스 아시아'가 지난달 16일부터 21일까지 2400명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다만 1위와 2위 후보간 격차가 2배 이상 벌어진 상태이지만 정치 분석가 테마리오 리베라는 "로브레도에 대한 최근 지지 상승이 이번 여론 조사 결과에 반영되지 않았다"며 막판 반전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서도 배제하지 않았다.

kha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