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아르메니아 서방 밀착에 압박 강화…농산물 수입도 제한

美·EU와 협력 노선에 보복성 조치…석유·가스 공급 중단 경고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23년 12월 26일 (현지시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CIS 정상 회의 중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와 차르스코예 셀로 박물관의 예카테리나 궁을 방문하고 있다. 2023.12.27 ⓒ AFP=뉴스1

(서울=뉴스1) 유철종 전문위원 = 러시아가 친서방 행보를 본격화하고 있는 옛 소련 국가 아르메니아를 상대로 보복성 경제 압박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28일(현지시간) 러시아 독립언론 '메두자'에 따르면 러시아 동식물감독청(로스셀호즈나드조르)는 이날 오는 30일부터 아르메니아산 토마토, 오이, 고추, 딸기 등의 과일·채소류 수입을 한시적으로 제한한다고 밝혔다.

감독청은 보도문에서 "아르메니아산 과채류 수입 과정에서 규정 위반이 잦아져 위생 검역 안전 확보를 위해 해당 결정을 내렸다"면서 "현재 상황은 러시아의 검역 안전에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감독청은 이달 21~27일 실시한 아르메니아 농산물 수출 업체 점검에서 온실 시설 내 병해충이 발견되는 등 위반 사항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또 아르메니아산 채소의 상당량이 소유 구조가 불분명한 업체들을 통해 수출되고 있으며, 이들 업체가 위생 검역 절차를 회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감독청은 앞서 지난 23일에는 아르메니아산 광천수 수입을, 22일에는 화훼류 수입을 잠정 금지했다.

러시아 당국은 자국과 정치·경제 관계가 악화한 국가들에 대해 해당 국가산 제품의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자주 취해 왔다.

지난 2006년에도 친서방 노선을 노골화하던 옛 소련 국가 조지아(그루지야)와 몰도바 생산 와인과 광천수 수입을 금지했고, 2014~15년엔 폴란드 산 채소와 과일을, 2015년엔 튀르키예 토마토 수입을 금지한 바 있다.

이날 아르메니아에 대한 러시아 검역 당국의 제재는 앞서 이루어진 에너지 공급 차단 경고에 뒤이어 곧바로 발표됐다.

세르게이 치빌료프 러시아 에너지부 장관은 지난 26일 아르메니아 측에 보낸 서한에서 "아르메니아가 유럽연합(EU) 가입을 계속해 추진할 경우 러시아는 아르메니아와의 가스·석유제품·다이아몬드 등의 무관세 공급 협정을 잠정 중단하거나 파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아르메니아가 러시아 주도의 옛 소련권 경제협력체인 유라시아경제연합(EAEU)에서 벗어나 EU와의 협력을 강화해 나가면 특혜 가격으로 공급해 오던 천연가스와 석유 공급을 중단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러시아의 이같은 제제와 경고는 최근 아르메니아가 EU 및 미국과의 협력을 확대하며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데 대한 보복 조치로 해석된다.

아르메니아는 지난 26일 미국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협정'에 서명했다.

이번 협정에는 원자력 분야 및 주요 광물 관련 협력, 아르메니아 남부를 가로지르는 교통·물류 회랑(TRIPP) 건설 추진 등이 포함됐다.

이에 앞서 지난해 3월 아르메니아 의회는 EU 가입 절차 개시에 관한 법률을 채택하고 EU행을 서두르고 있다.

지난 27일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는 다음달 7일 총선을 앞두고 유권자들과 한 면담에서 아르메니아가 EU에 머물지, EAEU에 머물지는 자신이 아니라 국민이 결정할 문제라면서 "나의 과제는 여러분들이 여러 대안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르메니아는 자국 영토에 러시아 군사기지를 두고 있고, 러시아가 주도하는 옛 소련 국가들의 군사협력체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는 물론 옛 소련권 경제협력체인 EAEU에도 참여하는 등 군사, 경제적으로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하지만 2022년 대규모 국경 충돌을 비롯한 숙적 아제르바이잔과의 무력 분쟁에서 러시아가 지원 요청을 거부한 이후 CSTO 참여를 중단하고 EU 및 미국과의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cjyou@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