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버린 AI, 인공지능 주권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가[동남아시아 TODAY]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장
미국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A.I'(Artificial Intelligence)라는 영화를 만든 게 2001년의 일이다. 영화는 사실 우수한 두뇌를 가진 로봇에 관한 것이었지만 AI에 관한 인간의 상상이 어디까지 뻗었는지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났고, 세계 도처에서 인공지능과 반도체 열기가 나날이 뜨거워지고 있다.
AI 열풍은 동남아시아도 예외가 아니다. 나비고(Navigos), 탑씨비(TopCV)와 같은 베트남의 구직 플랫폼에서 2026년 고용 시장의 핵심 키워드는 '영업'과 함께 '반도체', 'AI'였다. 그만큼 직업을 구하는 대학생들과 기존 개발자들도 AI, 반도체나 데이터 사이언스 관련 직무로 취업하거나 전환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 역시 2030년까지 AI 전문 인력 50만 명을 양성하겠다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그뿐이 아니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선제적으로 AI 관련 법적 규제를 마련했다. 2026년 3월 1일 자로 'AI 법'이 시행되었는데, 가짜 콘텐츠와 딥페이크의 규제를 강화하고, 워터마크 등으로 'AI가 생성한 콘텐츠' 표시를 명시하도록 의무화했다. 게다가 의료, 금융, 교육 등 분야에서 사회 안정을 저해할 우려가 큰 AI 시스템에 대해서는 출시 전에 안전성 및 기술 표준의 부합 여부를 검증하는 '적합성 평가'를 거치도록 규정했다.
AI 법 외에도, 베트남은 '개인정보보호법'과 '신규 사이버보안법'이라는 강력한 규제망을 통해 외국 빅테크 기업과 데이터 센터를 압박한다. 사이버보안법은 베트남 사용자의 서비스 이용 기록, 개인 식별 정보, 계정 정보 등은 반드시 베트남 영토의 서버나 데이터 센터에 저장하도록 규정했다. 아울러 구글, 메타, 마이크로 소프트 등 해외 기업에 관해서도 강력한 콘텐츠 검열과 통제의 책임을 지운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야 하는 빅테크 기업의 현지 데이터 센터 운영도 쉽지 않은 것이다.
베트남을 비롯하여 동남아 국가들은 미국이나 중국 등 AI 분야 선두 국가의 테크 기업이 자신들의 데이터와 디지털 주도권을 빼앗지 못하도록 '소버린 AI'(Sovereign AI) 구축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소버린 AI는 AI 산업을 주도하는 미국 등의 특정 글로벌 빅테크에 일방적으로 인공지능 주도권을 종속당하지 않고, 자신들의 데이터와 인프라, 인력으로 독자적인 AI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싱가포르 정부 산하의 AI 싱가포르(AISG)가 주도해 개발한 SEA-LION(Southeast Asian Languages in One Network)을 들 수 있다. 실리콘 밸리의 AI를 가져다 쓰는 것은 미국 빅테크의 세계관과 이념에 종속될 수 있으니,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을 중심으로 동남아 자체의 AI 인프라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SEA-LION은 오픈소스 AI로 동남아시아의 언어, 문화의 특성을 반영하기 위해 개발된 동남아 최초의 지역 특화 거대언어모델(LLM)이다. 서구 빅테크 기업들이 독점한 생성형 AI 시장에서 동남아시아의 기술 자립과 AI 주권 사수를 목적으로 한다. 그에 따라 인도네시아어, 말레이어, 베트남어, 태국어 등 동남아 11개국의 언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기존의 챗지피티(ChatGPT)나 클로드(Claude) 등 글로벌 AI가 영어 및 서구권 언어에 90% 이상 의존한 것과 대비되는 점이다.
게다가 SEA-LION은 동남아의 문자 체계에 최적화되어 동남아 언어를 처리할 때 기존 서구의 AI보다 속도가 최대 3~4배 더 빠르고 저렴하다. 싱가포르 정부는 이 모델을 오픈소스로 공개하여 무료로 동남아 여러 나라의 스타트업, 중소기업, 정부 기관이 각자 쓰고 싶은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소버린 AI는 기본적으로 디지털 식민주의를 방지하고 AI 주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기반해 시작된 것이다. SEA-LION을 두고 미국과 중국의 AI는 안 되고, 싱가포르의 AI는 괜찮냐는 미심쩍은 시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싱가포르는 동남아 전체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한 인공지능이라고 하지만, 개발 주체와 데이터 통제권이 싱가포르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싱가포르의 시각으로 정제된 AI'라고 경계하는 시각도 있다.
싱가포르는 아세안의 기술 및 금융 중심지이다. 자신들이 만든 LLM을 선제적으로 제공하여 동남아 전체의 플랫폼 역할을 함으로써, 싱가포르가 AI 시대의 역내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없지 않다. 그렇기는 해도 동남아가 11개국의 언어와 문화를 중심에 두는 소버린 AI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가벼이 여길 사안은 아니다.
비슷한 문제는 개별 국가 단위에도 있다. 동남아시아는 단일민족국가와는 거리가 멀다. 한 나라에도 많은 민족들이 공존한다. 베트남만 해도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민족만 54개이다.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 민족도 많다는 이야기다. 영토가 훨씬 넓은 미얀마나 인도네시아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인터넷에 축적된 디지털 데이터는 인도네시아어, 태국어처럼 각 나라 주류의 '지배적 언어'에 쏠려 있다. 소수 민족은 물론이고, 비주류 민족들의 언어와 문화는 인공지능 세계에서 눈에 띄지도 않는 '비가시화'(invisibilization)가 가속화되는 것이다.
이처럼 동남아 각국이 개발 중인 로컬 거대언어모델은 기술 주권을 확보하고, 국가의 자립성을 높인다는 명분이 있으나, 동남아 내부 소수 민족을 소외시키는 '내부적 편향'을 확대·재생산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동남아 몇몇 국가의 시민단체들은 빅테크의 서구 편향을 피하려다 '국가 권력이 공인한 로컬 편향'에 갇힐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그렇다고 해서 소버린 AI를 포기할 수도 없다. 소버린 AI는 인공지능 만능의 시대에도 주권이란 중심과 주변, 지역과 지역 간 불균형 문제와 다시 연결된다는 것을 또렷하게 상기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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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에서 '가성비 관광지'와 '저임금 생산기지'로만 여겨지던 동남아시아가 뜨고 있습니다. 높은 잠재력의 소비시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미중 패권 경쟁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동남아를 모릅니다. 더욱 가깝게 지내야 하는 이웃인 동남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서강대 동아연구소 필자들이 격주로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