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로용: 함께 가면 멀리 간다'의 이면 [동남아시아 TODAY]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장
최근 한국을 방문한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말로 양국의 긴밀한 협력을 다짐했다. 어깨의 짐을 함께 진다는 인도네시아 '고통 로용'(gotong royong) 전통을 에둘러 표현한 셈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특별 포괄적 전략 동반자관계'로 양국 관계를 격상하는 데 합의한 만큼 여러 분야에서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미래 협력이 구체화할 것으로 보인다.
인도네시아가 어떤 나라인가. 1955년 제3세계의 깃발을 높이 들며 반둥회의를 개최했던 나라다. 좌우로 양분됐던 전후 세계 질서 속에서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신생독립국들의 중립을 주도한 비동맹의 역사가 깊은 곳이다. 이념보다 실익이 중요하리라는 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실익이 가장 중요한 건 아니다. 명분과 정당성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지난 1월 인도네시아 정부는 미국이 설립한 '평화위원회'(Board of Peace) 참여를 재검토하겠다고 한 바 있다.
평화위원회는 가자 지구의 재건과 평화 관리를 위한 비공식적 다자 플랫폼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 주도의 중동 평화 프레임과 연결되는 기구다. 인도네시아가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외교 채널인데도 정부에서 평화위원회 참여의 정당성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한다는 발언이다.
인도네시아의 부정적인 분위기는 미국이 이란을 공격하면서 "평화를 말하는 나라가 전쟁을 한다" 혹은 "같은 나라가 가자와 이란에서 각기 다른 행동을 한다"는 비난이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이어지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미국의 도덕적 정당성이 부정되면서 평화위원회를 신뢰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확산한 것이다. SNS에서는 인도네시아가 미국의 프레임에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느냐, 반둥회의의 정신을 잊었냐는 등의 말들이 오갔다.
평화위원회 참여 재검토는 국제정치적 역학 관계에 따른 입장이라기보다 비동맹운동의 기치가 디지털 환경에서 재편되면서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70여 년이 지났어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반둥 정신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말이다. 반둥회의로 촉발된 비동맹운동은 그저 단순한 중립 노선이 아니라 식민지에서 독립한 신생국들의 주권 존중과 내정 불간섭, 반제국주의를 내세운 새로운 국제질서의 판짜기였다.
인도네시아가 미국이 주도하는 가자 지구 재건에 참여하는 것이 비단 인도주의 정신 때문이라고만 해석하기 어렵다. 이 가운데, 미국이 이란을 공격하고 전쟁은 주변으로 확산됐다.
이 국면에서 드러난 인도네시아 SNS상의 '친이란' 관련 담론은 미국이라는 외부 세력의 이란 내정 개입에 대한 구조적 반감에서 비롯됐다. 이란의 권위주의 정부, 내부 억압 문제는 외부 개입이라는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문제로 인해 후순위로 밀린 것이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이란의 기존 정치체제나 폭압적인 내정 문제를 부정하거나 옹호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주권 국가에 대한 외부의 공격은 정당화될 수 없다"며 미국을 비난한다. 비동맹운동이 강조했던 내정 불간섭의 원칙이 직설적으로 SNS에 표출된 모습이다.
이란 전쟁은 인도네시아에서 글로벌 권력 구조 속에 아무 원칙 없이 '무력으로 개입하는 강대국 미국'과 '외부 압력을 받은 이란'이란 틀로 재해석된다. 여기서 인도네시아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주권 국가에 부당하게 개입한 게 누가인가라는 관계성이다. 부당한 개입이 명확하면 인도네시아 정부는 원칙적으로 긴장 완화와 외교적 해결을 강조하며 어느 한쪽을 명시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입장을 취할 것이다. 비동맹운동의 전통적 외교 방식인 전략적 모호성과 다자주의에 기반한 접근이다.
물론 이게 다가 아니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인 인도네시아에서 이슬람 국가들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쟁 발발 이후 걸프만의 이슬람 국가들도 이란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아무리 반이스라엘 정서가 강해도 인도네시아 정부로서는 어느 한 편에 서기 어려운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다.
팔레스타인 문제도 그렇다. 평화위원회 '불참'이 아니라 '재검토'인 이유다. 미국과 '함께, 멀리 가기'를 원치 않지만 관계를 끊을 수도 없다는 뜻이다. 팔레스타인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그저 분쟁 지역이 아니라 식민과 점령, 글로벌 불평등의 상징이다. 이제 팔레스타인 대 이스라엘의 구도는 미국·이스라엘 대 이란 구도로 확장됐다. 이러한 시점에 인도네시아 정부의 평화위원회 참여 검토 발언은 전쟁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간접적인 부정으로 읽힌다.
미국과 이란 갈등을 둘러싼 인도네시아의 반응에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공유하는 주권 중심의 세계관과 반제국주의가 기저에 있다. 이는 한편으로 인도네시아가 비동맹운동의 유산을 여전히 계승하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디지털 환경에 맞게 이를 감정적이고 단순화된 서사로 재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전쟁이야!" 같은 메시지와 함께 전쟁 이미지가 하나의 게시물이 돼 SNS에서 소비되는 양상은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주지만 파급 효과는 크다.
눈에 보이는 즉자적 발언이 힘을 얻는 상황에서 정부가 단호한 발언을 하기는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분담'을 주장하는 미국에 대해 인도네시아가 '고통 로용'으로 응답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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