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TODAY] 노회한 정치인의 뒷담화 전략

(서울=뉴스1)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장 = 동남아에서 '한류' 다음으로 관심이 높은 것은 아마 '태류'일 것이다. 방송과 음악 등에서 태국의 영향력(Thai Wave)은 상당히 크다. 특히 대륙부 동남아의 캄보디아와 라오스, 미얀마에서 태국의 영화와 드라마, 대중음악의 인기가 높고, 음식과 패션의 유행도 눈에 띈다. 그런데 최근 캄보디아에서 태류에 제동이 걸렸다. 지난 5월 28일,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3개국 국경 지대인 '총복'(Chong bok)에서 태국과 캄보디아의 군인들이 충돌해 캄보디아 군인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단이 됐다. 갈등과 협력의 역사로 점철된 양국은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새로운 긴장 관계에 들어섰다.
태국이 캄보디아로 가는 국경의 진출입을 전면 차단하면서 선수를 쳤다. 이에 캄보디아도 양국 간 국경 검문소 2곳을 영구 폐쇄하는 한편, 태국의 과일, 채소, 통조림, 수산물 수입을 줄이고 태국의 영화와 드라마도 전면 차단했다. 태국이 캄보디아의 생명줄과 다름없는 전력과 통신망도 차단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자, 캄보디아의 훈 마넷 총리는 차제에 "디지털 자립"을 하겠노라며 맞불을 놓았다. 양국의 갈등이 가히 일파만파로 번지는 모양새다.
게다가 불에 기름을 붓는 일이 벌어졌다. 두 나라 지도자의 내밀한 통화 내용이 유출된 것이다. 캄보디아 총리를 지낸 훈센 상원의장이 패통탄 친나왓 태국 총리와 나눈 통화 내용을 정부 관계자들에게 들려줬는데, 그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파장이 더 커졌다. 젊은 패통탄 총리가 통화 중에 자기 아버지인 탁신 전 총리와 오랜 친분을 이어온 훈센 의장을 "삼촌"이라고 불렀고, 자국의 군사령관은 "반대 세력"이라고 비판한 험담도 공개됐다. 태국의 군부와 보수 세력은 즉각 총리에게 등을 돌렸다.
패통탄 총리가 그런 발언을 한 맥락과 의도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태국의 총리가 갈등 관계에 있는 캄보디아의 정치지도자에게 자기 나라의 군부를 신뢰하지 않는 듯한 발언을 했으니, 태국의 여론도 고울 리 만무했다. 태국 국민 10명 중 8명은 패통탄이 잘못에 책임지고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으로 조사됐다. 급기야 보수 상원의원들이 패통탄 총리 해임심판을 제기했고, 태국 헌법재판소는 본안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총리의 직무를 잠정 정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훈센은 왜 통화 내용을 유출했을까? 태국 정부를 압박하고, 캄보디아에 유리하게 분쟁을 해결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노회한 정치가 훈센의 속셈이란 풀이도 있다. 태국에서는 훈센이 특정 정치 세력을 부추겨 우회적으로 태국 내정에 개입하려 통화를 의도적으로 흘렸다고도 본다.
분명한 것은 '구설'의 파장이다. 산전수전 겪은 73살의 훈센은 39살의 '조카뻘' 패통탄 총리를 궁지로 몰아넣어 국경 분쟁의 초점을 태국의 내정 문제로 돌려버렸다. 수십 년간 이어진 훈센과 탁신 가문의 국경을 넘은 우호 관계를 제물로 바치면서 말이다. 패통탄이 휘청거리는 사이, 훈 마넷 캄보디아 총리는 2026년부터 징병제를 시행한다고 전격 공표했다. 그간 유명무실했던 징병법을 가동하는 이번 조치로 인해 내년부터 18~30세의 캄보디아인 모두 24개월의 병역 의무를 지게 된다. 이로써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 3국 가운데 마지막으로 징병제를 시행하는 나라가 됐다.
훈센가와 탁신가의 관계에서 드러나듯, 인접한 캄보디아와 태국은 예로부터 협력하되 온전히 믿지도 않으며, 갈등하되 완전히 적대하지도 않는 미묘한 사이다. 게다가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분쟁은 더 얽히고설키게 됐다. 양국 국경에 걸쳐 있는 고대 크메르 유적인 프레아 비헤아(Preah Vihear) 사원을 둘러싼 갈등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태국만의 '중복 청구 지역'(OCA: Overlapping Claim Area)을 둘러싼 해양 영유권 분쟁도 제국주의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맥락은 비슷하다. 제국주의가 뿌린 씨앗에서 자라난 국민국가 간 영토 분쟁은 탈식민 시대에 불가피한 일일지 모른다. 시작이 어찌 되었든 작은 불씨가 산불이 되면 국경을 넘나들던 사람과 자원과 문화도 길을 잃는다. 누가 가장 힘들 것인가 경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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