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A 판결은 남중국해 갈등을 해소시킬 수 있을까

전문가들 "比의 완승으로 中협상 여지 줄어"

ⓒ News1 최진모 디자이너

(서울=뉴스1) 최종일 기자 = 지난 1974년 1월 패망 직전의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은 남중국해 파라셀 군도(중국명 시사군도·베트남명 호앙사) 서쪽 지역에 중국 인민해방군 군인들이 아무런 통보 없이 상륙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파라셀 군도 서쪽은 당시 남베트남이 점유하고 있었다.

중국 군인들을 쫓기 위해 남베트남 군함이 출동해 충돌이 벌어졌다. 남중국해에서 발생한 국가간 첫 군사적 충돌이었다. 이틀간의 교전으로 남베트남군인 53명이, 중국군인 18명이 전사했다. 교전에서 승리한 중국은 파라셀 군도 전체에 대한 실질적 점유를 시작했다.

앞서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 체결로 미국이 남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면서, 파라셀 군도 내 주둔 군인 수는 줄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상황이 자국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으로 판단해 작전을 펼쳤다. 중국은 1988년 통일 베트남과 스프래틀리 제도(난사군도·南沙群島) 인근에서 한 차례 더 무력 충돌했다.

이후 남중국해에서 정부 간 무력 충돌은 없었다. 자원 공동 개발 등 평화적 노력도 전개됐다. 하지만 남중국해는 막대한 자원의 보고일 뿐 아니라 해양 진출 및 접근로인 동시에 해군 발전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중국과 동남아 이웃 국가들 간의 영유권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고 최근 들어서는 군사적 긴장이 높아졌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PCA)가 12일(현지시간) 필리핀이 제기한 남중국해 분쟁과 관련해 내놓은 판결은 국제법에 의거한 평화적 해법 마련을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미 정부 관리들 이날 판결이 외교적 수단에 기대도록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희망했다.

중국이 시사군도 천항다오에 헬리콥터 이착륙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진출처=환구망)ⓒ 뉴스1

대니얼 크리텐브링크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은 외신에 이번 판결은 "남중국해에서 평화적 해법이라는 이해 당사국의 공통된 목표를 달성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교수이자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밑에서 정책기획을 맡았던 윌리엄 버크 화이트는 CNN 기고문에서 역내 국가들로 하여금 리더십을 인정하고 이를 따르게 하려면 중국은 '국제 규칙의 파괴자가 아닌 추종자'가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국제 사회의 압박에 의해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공세적 입장이 누그러질 것이란 기대이다. 하지만 필리핀의 손을 들어준 이날 판결이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소시킬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은 많지 않다.

판결에 대해 추이톈카이 주미 중국대사는 워싱턴 소재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토론에서 "이것(판결)은 분명히 갈등, 심지어 대립을 심화시킬 것이다"며 "결국, 국제법의 권위와 유효성을 훼손시킨다"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중국은 처음부터 중재에 참여하길 거부했고 판결 이후에는 이번 결정은 "효력이 없다"고 입장을 분명히 했다. 중국이 수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PCA가 판결의 집행을 강제할 수 없다. 경찰도 제재 시스템도, 벌금을 부과할 능력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국제적 압박이라고 커질 것은 분명하지만 중국이 외톨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회원국들 사이에서도 입장차가 나타났다.

남중국해 시사군도.ⓒAFP=뉴스1

이번 판결에 대해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겪어온 베트남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은 사실상 PCA 판결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내놨지만, 그간 중국의 편에 서서 '분쟁 당사국 간 해결'을 강조해왔던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은 대외적으로 이번 판결에 대한 언급 자체를 자제하는 분위기다.

어떤 길을 선택할지에 대한 결정은 결국에 중국이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수의 전문가들은 필리핀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판결이다 보니 분쟁에서 중국이 취할 수 있는 협상의 여지가 오히려 줄었다고 보고 있다.

싱가포르 국립대학 법학원의 왕장위 교수는 CNN에 판결로 인해 "중국과 같은 대국에선 국가주의 분위기가 확산될 것"이라며 "다수의 온건파들도 매파로 만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호주 시드니대학 미국연구소의 애슐리 타운센드 연구원은 필리핀의 완승이 아니었다면 이번 판결은 지역 긴장에 "일종의 방화벽"이 돼 협상 창구가 열리도록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완패다보니 중국으로선 오히려 국제적 위상 추락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타운센드는 남중국해가 중국과 미국 간 향후 글로벌 갈등의 장이 되는 것은 어느 국가의 이익에도 도움이 되지않지만 "하지만 리스크가 작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며, 리스크는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은 "의도하지 않은 갈등 고조의 위험성을 알고 있다"면서 하지만 이번 판결에 승복하지 않음을 보이고 현재 입장을 바꿀 의도가 없다는 것을 보여야 하는 국내적 압박을 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싱가포르에 기반을 둔 지역 안보 전문가 이안 스토리는 중국 정부는 이 판결에 대응해 남중국해에서 군사적 존재감을 높일 것이며, 이로 인해 미국 및 동남아 국가와의 추가적 마찰이 불가피할 것으로 진단했다. 그는 AFP에 "남중국해 전역 해역은 앞으로 수개월 동안 전체적으로 더욱 혼란스러울 것이다"고 말했다.

필리핀과 베트남 시민 운동가들이 12일 마닐라에서 필리핀 측에 우호적인 네덜란드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PCA) 판결을 기대하며 국기를 흔들고 있다. AFP=뉴스1

중국의 대응에 대해서 여러 관측이 나온다. 남중국해에 방공식별구역(ADIZ)을 선포하거나 스카버러 암초(황옌다오)에 인공 구조물 설치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은 2012년 실효 지해하던 스카버러 암초를 중국이 점거하자 국제 법정에 해법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13일 류전민(劉振民)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중국은 우리가 받는 위협의 수준에 따라 ADIZ를 선포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중국해를 전쟁의 요람으로 만들지 말라. 중국의 목적은 남중국해를 우애와 협력의 바다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미국의 움직임도 중요하다. 판결에 의거해 법에 의한 지배를 강조하면 긴장이 높아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국이 남중국해에서 보다 활발한 역할을 보일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국방전문 조사분석기관 IHS컨트리리스크의 선임 컨설턴트 아마르짓 싱은 ABC방송에 중국의 주장은 무효라는 PCA의 판결을 보강하기 위해 미국은 지역 내에서 "항행의 자유" 순찰과 비행을 보다 활발히 진행할 수 있다.

미국 의원들 사이에서는 벌써 이 같은 요구가 나오고 있다. 공화당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애리조나)은 "중국의 과도한 해양 주장"에 미국은 주기적으로 반박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중국의 인공섬 일부는 간출지(low tide elevations)여서 12해리 영해 권리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미국은 이전보다 보다 근접 항해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날 워싱턴포스트(WP)는 "오바마 행정부는 갈등 심화를 경계해야 하고, 다른 국가들과 조율해 조용한 외교적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우리는 판결에 대한 중국의 대응 범위를 아직은 예측할 수 없다. 비난을 받은 중국이 새로운 도발을 벌여 위기를 부추길 수 있다. 중국이 힘을 사용하려고 한다면 미국과 동맹국들은 이에 대한 준비 태세를 갖춰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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