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인 빼고 역전승' 흥국 요시하라 감독이 던진 메시지[V리그 포커스]

기업은행전 4세트서 주포 레베카 제외…풀세트 끝 역전승
외인 의존·김연경 은퇴 후 무너진 한국 배구 문제점 돌아봐야

요시하라 토모코 흥국생명 감독. (KOVO 제공)

(서울=뉴스1) 권혁준 기자 = 18일 열린 V리그 여자부 흥국생명과 IBK기업은행의 경기는 명승부였다. 나란히 연승을 달리던 3위(흥국생명)와 4위(기업은행)가 맞붙었고 최종 5세트까지 가는 혈투를 벌였다.

승자는 흥국생명이었다. 1세트를 잡은 뒤 2, 3세트를 내리 내준 흥국생명은 4, 5세트를 연거푸 잡고 짜릿한 역전승을 일궜다.

흥국생명의 이날 승리가 의미 있는 건 단순한 역전승, 순위 싸움에서 우위를 점한 것 때문만은 아니다. 패배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팀 내 주포인 레베카 라셈을 과감하게 뺀 뒤 흐름을 바꿨기 때문이다.

이날 레베카는 감기 몸살 증세로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고, 공격 성공률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그러자 요시하라 토모코 흥국생명 감독은 4세트 시작 때 레베카를 벤치에 앉혔다. 이날 역시 부진했던 아시아쿼터 외인 아닐리스 피치도 주전에서 제외했다. 문지윤이 레베카 자리에 들어갔고 김수지가 피치를 대신했다.

문지윤은 4세트에만 팀 최다 5점을 기록하며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고, 베테랑 김수지도 블로킹만 2개를 잡았다. 요시하라 감독은 4세트 막판 잠시 레베카를 기용했지만 여의치 않자 다시 문지윤을 투입해 세트를 승리로 마무리했다.

5세트엔 문지윤 대신 다시 레베카가 들어왔는데, 이때도 최은지와 김다은이 공격을 분담했다. 결국 흥국생명은 빅토리아 댄착이 외롭게 분투한 기업은행을 누르고 역전승을 일궜다.

흥국생명 문지윤. (KOVO 제공)

이날 흥국생명의 승리를 '용병술'로만 보기는 어렵다. V리그에서 팀 내 주포인 외국인선수를 세트 시작부터 빼는 건 결단과 용기의 영역으로 봐도 될 정도이기 때문이다.

V리그는 남녀 불문하고 외국인선수의 의존도가 높다. 수비 부담을 줄이고 공격에 몰두하는 '아포짓 스파이커' 포지션은 대부분 외인이 담당하고, 많은 공격을 책임진다. 승부처가 되면 의존도는 더 높아지기 마련이다.

각종 지표만 봐도 외인 의존도는 쉽게 파악된다. 남자부는 득점 1위부터 8위까지가 모두 외인(아시아쿼터 1명 포함)이고, 여자부도 각 팀 외인이 득점 1위부터 7위까지 줄을 섰다. 이런 경향은 2005년 V리그 출범 이래 매 시즌 반복된 일이다.

V리그에서 외인이 벤치를 지키는 건 이미 '기량 미달'이 판명됐거나, 아프지 않는 이상은 극히 드문 경우다.

흥국생명 요시하라 감독처럼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감독은 많지 않다.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 해도 대안이 없기에 외인에 대한 의존은 언제나 높다.

감독이 과감한 결정을 해도 선수들이 부응해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레베카 대신 투입된 문지윤은 이날 경기 전 단 5경기만 뛰었고 모두 교체로만 코트를 밟았다.

그러나 문지윤은 오랜만에 출전해서 훌륭히 제 몫을 해냈다. 착실한 훈련과 준비의 결과물이라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감독의 영역이다.

외국인선수 없이 대역전극을 일궈낸 흥국생명. (KOVO 제공)

V리그의 지나친 외인 의존은 선수들의 경쟁력 약화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오랫동안 지속됐다. 국내 선수들이 리그에서 외인을 돕는 '보조' 역할에 머물면서, 주포급 국내 선수들의 기량 향상과 발굴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는 '배구 여제' 김연경의 은퇴 이후 국가대표팀의 경쟁력이 한순간에 하락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사실상 '외인'과 다름없던 김연경이 빠지면서 대표팀은 졸전을 거듭하는 '난파선'이 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한국 여자 배구의 오랜 라이벌인 일본 대표팀의 행보와도 크게 비교된다. 일본은 2000년대 이후 꾸준히 세계 10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특정 선수의 유무와 관계없이 탄탄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언제나 일정 수준을 유지한다.

흥국생명 요시하라 감독의 국적이 일본인 건 단순한 우연은 아닐 터다. 한 명의 스타 플레이어에게 의존하지 않고, 누가 들어와도 제 몫을 해낼 수 있는 시스템이 일본 국가대표팀의 그것과 닮았다.

단 한 경기뿐이었지만, 흥국생명의 역전승엔 굵직한 메시지가 담겼다. 인기는 올라왔지만 기량은 답보 상태라는 비판을 받는 V리그,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국가대표팀까지. 단순한 '외인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배구는 현 지점을 냉정하게 돌아봐야 할 때다.

starburyny@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