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용·FC서울, 사라져가는 '존중의 격'을 보여줬다

포항 기성용 첫 상암 원정…도움 올리며 승리 견인
서울 팬에 고개 숙여 인사…"최선 다해 뛰는 게 도리"

기성용은 FC서울 팬들에게 감사와 미안함을 전했고, 서울 팬들과 서울 구단은 기성용을 존중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서울=뉴스1) 임성일 스포츠전문기자 = 교체 후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기성용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친정' FC서울을 적으로 상대하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장소는 자신의 요람과 다름없는 서울월드컵경기장이었으니 감정은 더 묘했다.

만나자마자 기성용은 "정말 너무너무 힘든 경기였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당연히 육체적으로 힘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오늘 내 감정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했다.

기성용은 18일 오후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5 하나은행 K리그1 2025 33라운드' FC서울과의 경기에 선발 출전, 전반 28분 멋진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어시스트 하는 등 활약하며 2-1 승리에 기여했다.

이 경기는 일찌감치 '기성용 더비'로 조명됐다. 서울을 대표하던 아이콘에서 포항으로 이적하며 K리그 판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기성용이 처음으로 상암벌을 다치 찾은 날이었다. 사연 있는 경기의 주인공이 마침 기성용이었다.

팽팽하게 진행되던 경기는 전반 28분 기성용의 오른발로 인해 균형이 깨졌다. 프리킥 찬스에서 키커로 나선 기성용은 절묘한 궤적으로 박스 안에 공을 투입했고 이호재가 몸을 던지는 다이빙 헤더로 연결, 멋진 골을 만들어냈다.

페널티에어리어에서 제법 떨어진 위치에서의 오른발 프리킥이었는데 기성용다운 '택배 크로스'가 나왔다. 서울 골망이 열리자 기성용은 요란법석 없이, 그 자리에서 주먹 쥔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세리머니도 함축적이었다.

포항 유니폼을 입고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FC서울과 경기한 기성용(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경기는 포항의 2-1 승리로 끝났다. 반격에 나선 FC서울이 후반 21분 조영욱의 동점골로 균형을 맞췄으나 후반 39분 포항 주닝요의 결승골이 터지면서 희비가 엇갈렸다.

기성용은 승리를 눈앞에 둔 후반 42분 교체돼 필드를 빠져나왔는데, 걸음 속도를 줄이더니 잠시 멈춰 서울 서포터석을 향해 깊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서울 팬들도 기성용에게 박수를 보냈다.

한때 '우리 팀'이었던 선수가 팀을 옮겨 적으로 돌아오면 등장부터 야유가 쏟아지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선수가 과거의 팬들에게 거칠게 대응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하지만 기성용과 FC서울 팬들은 달랐다.

경기 후 기성용은 "서울은 내게 특별한 팀이다. 어렸을 때부터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꿈을 키웠다. 대표팀에서도 그렇고 FC서울 소속으로도 그렇고 상암에서는 언제나 홈 라커룸만 사용했는데 오늘 처음으로 원정팀 라커룸에 들어갔다"면서 "이번 경기를 준비하면서 감정을 내려놓자 마음먹었으나 나도 인간이기에 복잡한 마음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고 전했다.

이어 "내게 서울 팬들은 너무 소중한 분들이다. 여전히 사랑을 주시는 팬들도 감사하지만, 나를 비난하는 팬들도 충분히 이해한다"면서 "내가 최선을 다해 뛰는 것이 서울 팬들에 대한 도리라 생각했다. 경기 후 인사도 마찬가지다. 포항 팬들도 이해해 주실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포항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이젠 포항의 선수가 된 기성용은, 포항 팬들과 동료들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기성용은 "포항에서 다시 축구를 할 수 있어 감사하다. 포항의 팬들은, 그라운드 안팎에서 날 정말로 반겨주신다. 박태하 감독님을 비롯해 포항의 모든 동료들도 나를 많이 배려해주고 있다. 덕분에 축구에 다시 집중할 수 있었다"고 인사한 뒤 "포항 팬들에게는 고맙고 서울 팬들에게는 미안하다"며 복잡한 심경을 밝혔다.

원정팀 선수에게 긴 시간을 할애에 공식 기자회견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경기에서 패한 FC서울은 상대팀 수훈 선수에게 안방을 내줬다. 회견 후에는 서울 프런트와 기성용이 포옹하며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감독과 심판, 심판과 선수, 선수와 팬, 구단과 구단 나아가 감독과 선수들까지 비난을 넘어 저주를 퍼붓는 것 같은 흉한 모습들이 자주 보이고 있다. 구성원을 향한 존중이 사라져가는 K리그 판에 기성용과 FC서울이 좋은 예를 남겼다. 결국은 함께 걸어가야할 '동반자'다.

lastuncle@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