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 의사의 '수면마취 장사'…잠든 환자 상대로 성범죄까지
미용시술 빙자해 의료용 마약류 182차례 투약…4억 5700만 원 챙겨
대체 마취제 오남용 첫 확인…경찰, 약물 규제·제3자 동석 의무화 요청
- 권준언 기자
(서울=뉴스1) 권준언 기자 = 미용시술을 빙자해 프로포폴 등 의료용 마약류를 불법 투약하며 수억 원을 챙긴 의사들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 가운데 한 명은 수면마취 상태인 환자의 신체를 수십 차례 불법 촬영하고 추행하기도 했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마약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사용된 대체 약물의 오남용 실태도 확인했다. 유사 범행과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한 약물 규제와 제도 개선을 관계 부처에 요청했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마약범죄수사대는 마약류관리법 위반과 준강제추행, 성폭력처벌법상 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로 40대 의사 A 씨를 구속했다고 26일 밝혔다.
경찰은 A 씨와 동업 관계였던 50대 의사 B 씨, 행정실장 1명, 투약자 11명 등 총 14명을 검거했다. 투약자 가운데 코카인을 소지한 혐의를 받는 C 씨도 구속됐다.
A 씨는 2021년 11월부터 2023년 11월까지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자신이 개설한 의원을 찾은 7명에게 프로포폴 등 의료용 마약류를 71차례 불법 투약하고 4000만 원을 챙긴 혐의를 받는다.
B 씨는 2022년 7월부터 약 1년간 투약자 8명에게 프로포폴과 미다졸람, 레미마졸람, 케타민 등을 111차례 투약하고 4억 1700만 원을 벌어들인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두 의사가 챙긴 4억 5700만 원을 범죄수익으로 특정해 기소 전 추징보전을 신청했다.
이들은 미용시술을 내세워 불법 투약을 정상 진료처럼 꾸몄지만 실제 시술은 생략하거나 형식적으로만 진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투약 요구와 결제 금액에 맞춰 약물을 투약했고, 심야나 휴일에도 의원 문을 열어 '수면마취 장사'를 이어갔다.
경찰은 이들이 마약류를 취급할 수 있는 의료인의 권한과 약물의 강한 중독성을 돈벌이에 악용했다고 판단했다.
투약자들의 중독 실태도 심각했다. 한 투약자는 하루에만 1350만 원을 결제했고, 의원에 13시간 동안 머문 사례도 있었다. 또 다른 투약자는 11개월 동안 64차례 의원을 찾아 2억 5300만 원을 쓴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에 따르면 A 씨는 의료용 마약류 불법 투약에 그치지 않고 수면마취 상태인 환자를 상대로 성범죄까지 저질렀다. A 씨는 2021년 7월부터 2022년 2월까지 저항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인 여성 환자 1명의 신체를 27차례 불법 촬영한 것으로 조사됐다.
수면마취제를 투약한 환자가 범행을 인지하거나 저항하기 어렵고, 마취에서 깨어난 뒤에도 피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경찰은 불법 촬영 과정에서 이뤄진 신체 접촉에 준강제추행 혐의를 적용했다. A 씨는 해당 혐의를 부인했지만 경찰은 압수수색 등을 통해 확보한 증거를 토대로 지난 9일 A 씨를 구속했다.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는 의료용 약물과 수면마취의 취약성을 악용한 범죄를 잇달아 적발해 왔다.
2023년 12월에는 이른바 '압구정 롤스로이스 사건' 운전자에게 마약류를 불법 투약한 의사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수면마취 환자 10여 명을 성폭행한 혐의까지 추가로 밝혀내기도 했다.
경찰은 앞으로도 의료기관이라는 폐쇄적 공간과 수면마취 환자의 무방비 상태를 악용한 범죄를 지속해서 추적하고, 의료계 내 불법 투약과 이를 이용한 성범죄를 엄정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이들 의사는 당국의 마약류 감시망을 피하면서 투약자의 수면 상태를 장시간 유지하기 위해 일반 수면마취제까지 끌어다 쓴 것으로 조사됐다.
프로포폴 등 의료용 마약류에 마약류로 지정되지 않은 '덱스메데토미딘'과 '에토미데이트'를 섞어 투약하는 방식이었다.
덱스메데토미딘이 마약류 대용으로 오남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번 경찰 수사에서 처음 드러났다. 이 약물은 최근 음성적으로 거래되며 신종 마약 대용 약물로 떠오른 동물용 마취제 '메데토미딘'과 사실상 같은 성분이다.
경찰은 유사 범행과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덱스메데토미딘을 마약류로 지정하는 방안 등 신속한 규제 검토를 요청했다.
이들이 함께 사용한 에토미데이트도 오랜 기간 마약류 대용으로 오남용된 약물이다. 경찰의 수사와 지정 요청을 거쳐 지난해 8월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지정됐으며, 올해 2월 13일부터 마약류로 관리되고 있다.
수면마취 과정에서 간호사 등 제3자가 반드시 동석하도록 하는 이른바 '샤페론 제도'의 의무화도 요청했다. 국내에서는 대한의사협회 윤리 지침에 관련 내용이 있지만 권고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경찰 설명이다.
강선봉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1계장은 "이번 사건은 피해자가 범행을 인지하거나 저항하기 어렵다는 점과 외부 감시가 닿지 않는 병원 내부의 구조적 취약성을 교묘하게 악용한 중대 범죄"라며 "유사 약물에 대한 선제적 규제와 실효성 있는 피해자 보호 장치 마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e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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