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는 노인, 한잔도 안되냐"…금주구역 된 탑골공원, 엇갈린 반응
내년 3월 31일까지 계도기간…"쉼터 없는 70·80 단속해야겠냐"
"싸움·노상방뇨 없어져 좋아"…전문가 "노인 여가 공간 마련해야"
- 신윤하 기자, 유채연 기자
(서울=뉴스1) 신윤하 유채연 기자
"돈 없고 소일거리 없는 노인들이 막걸리 한잔하는 것도 못 하게 막는 건 노인 학대죠."
어르신들로 북적이는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바둑·장기가 제한된 데 이어 음주도 금지됐다. 종로구가 탑골공원에서 음주 적발 시 과태료 10만 원을 부과한다고 밝힌 가운데, 시민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삶이 적적해 탑골공원을 찾던 노인들은 "편하게 머물 곳이 점점 사라진다"고 토로했다. 반면 시민들은 "주취자가 많아서 미관상 안 좋았는데 음주를 금지한다니 잘됐다"는 반응이다.
지난 9일 오전 뉴스1이 탑골공원에서 만난 이영만 씨(80·남)는 "나 같은 일반 시민들이 노숙자에게 '탑골공원이 문화재 보호구역 안이기도 하고 외국 관광객도 많이 오는데 좀 깨끗이 해라' 아무리 말해도 술판을 벌이고 담배꽁초를 버린다"며 "구청이 음주 금지한 건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 이날 오전 9시부터 탑골공원 북문 일대에는 술에 취한 노년층 주취자들이 고성을 지르며 배회하거나, 박스를 깔고 앉아 소주를 마셨다. 한 취객은 혼자 앉아 500mL 생수병에 든 소주를 마셨다. '탑골공원 내·외부는 금주 구역입니다'란 글씨가 적힌 현수막이 설치돼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만 종로구가 지난 1일부터 계도 기간을 시작한 이후로 주취자가 많이 줄어든 모습이었다. 음주하는 시민들을 말리던 종로구청 관계자는 "서울역, 청량리, 영등포에서 유입된 노인들이 여기 많은데, 그래도 지난해에 비해 많이 바뀐 거다"라며 "꾸준히 단속 계도하다 보니 시민들도 공원 내에서 술을 못 먹는다는 걸 알아서 웬만하면 음주 안 하시려 한다"고 설명했다.
시민들은 계도 기간이 시작된 후 주취자가 많이 줄었다고 반색했다.
서울 노원구에 살면서 매일 탑골공원을 찾는다는 정 모 씨(85)는 "여기서 술 마시면 맨날 싸우고 누워있고 노상 방뇨하고 별 걸 다하지 않냐"며 "술 못 먹게 하고 장기 두는 것도 없애니까 저렇게 깨끗하고 얼마나 좋냐"고 했다.
정 씨는 "금주 구역으로 정해지기 전까지는 여기 탑골공원이 꽉 차게 (취객이) 많았다"며 "지난달 말쯤부터 이곳이 깨끗해졌다. 벌금도 부과한다는 뉴스를 봤는데 (술병이) 위생에도 나쁘고 보기에도 나쁜 만큼 찬성한다"고 강조했다.
구청의 계도를 통해 취객이 더 줄었으면 좋겠단 시민들도 있었다. 시민 이 씨는 "낮에도 취객 대여섯명이 보기 흉할 정도로 술을 마신다"며 "장기나 바둑도 (노인들이 즐기기) 좋긴 했는데 그것도 사람들이 술 먹으면서 하니까 개판이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과의 교류가 적은 노인들이 머물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며, 금주 구역으로 정한 건 과도하단 목소리도 나왔다.
김명희 씨(76·남)는 "돈 없는 노인들이 와서 막걸리 한 병 먹는 걸 가지고 단속하는 것은 너무 과도하다"며 "여기는 70·80대가 제일 많이 오는데, 이 사람들은 일자리도 없고 사회에서 역할이 별로 없다"고 했다.
김 씨는 "소일거리 없는 노인들이 마땅히 할 역할도 없고 쉼터도 없다 보니 탑골공원 근처에 모이는 건데 막걸리 먹거나 장기·바둑 두는 것도 못 하게 하는 건 노인 학대"라며 "나이 먹은 사람들이 구멍가게에서 과자나 사서 저렴한 가격으로 막걸리 한잔 먹는 걸 단속하는 건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남녀노소 이용 가능한 공원 내부를 금주 구역으로 정한 것은 타당해도, 외부까지 금주 구역으로 정한 건 불필요하단 의견도 제기됐다. 과음하는 취객들에 대해서만 제한하는 등 음주 정도에 따라 부분적으로 계도해야 한단 주장도 있었다.
김 씨는 "공원은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누구나 이용할 수 있으니 내부에서 음주하는 걸 제한한 것은 타당성이 있다"며 "하지만 여기 외부 주변은 공간도 넓고, 사람의 통행이 많은 것도 아닌데 음주를 단속하는 건 해선 안 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공원 밖 북문 옆에서 소주를 마시던 70대 권 모 씨(남)는 "너무 술을 많이 먹으니까 우리끼리 말다툼하고 좀 시끄러운 게 있긴 하다"며 "조금씩 먹는 사람들은 남 보기 안 좋다고 물병에다 부어서 먹기도 한다"고 했다.
권 씨는 "말다툼하고 시끄럽게 하는 취객만 제지하면 될 것 같다"며 "나는 오전에 종이컵 한 컵, 오후에 나머지 소주를 마시고 집에 들어간다. 갈 데도 없고 그렇다고 돈이 있어서 술집에 들어갈 것도 아니지 않냐"고 했다.
전문가는 지자체가 일부 지역을 금주 구역으로 지정하되, 노년층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인들이 갈 수 있는 건전한 여가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며 "종로구에 있는 서울노인복지센터가 대안적인 공간을 마련해줬는데, 그 외에도 어르신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가까운 지역사회 내 안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종로구청은 내년 3월 31일까지 계도 기간을 실시한 후 4월 1일부턴 음주 적발 시 과태료 10만 원을 부과한다. 열린 술병을 소지하거나 주류를 다른 용기에 옮겨 마시는 행위도 단속 대상이다.
sinjenny97@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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