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증 사본으로도 계좌 털리는데…법원은 "원본과 차이 없어"
피싱 속아 사본 유출 당한 피해자들…"은행 인증 부실"
대법 판결에 '분통'…"더 위험한 거래 환경 조성될 것"
- 김형준 기자
(서울=뉴스1) 김형준 기자
"하룻밤 만에 2억 3000만 원이 넘는 돈이 비대면 거래로 빠져나갔어요. 연로한 어머니가 보낸 신분증 사진 한 장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보이스피싱을 당해 2억 3000여만 원의 피해를 본 박 모 씨(여)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가 피싱범에게 보낸 신분증 사진이 발단이었다.
범행은 순조로웠다. 사본만으로도 은행 앱 인증 체계는 쉽게 뚫렸다. 범인은 신분증 사본으로 OTP까지 만들어 2차 인증 체계까지 뚫어 모든 계좌에서 돈을 빼돌렸다. 박 씨는 은행을 상대로 소송에 나섰지만, 은행은 본인 인증에 '상당한 의무'를 다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다시 한번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29일 뉴스1 취재를 종합하면 전화와 메신저 등을 통한 피싱 사기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신분증 사본을 도용당해 금융 피해를 본 피해자들의 고통이 이어지고 있다.
피해자들은 최근 신분증 사본을 통한 본인 인증과 원본을 통한 인증이 차이가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위기다.
대법원 판례가 자리잡으면서 금융사들이 본인인증 강화에 대한 투자를 줄일 수 있고 피해자들의 하급심 심판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다.
대법원 2부(주심 엄상필 대법관)는 지난 14일 A 저축은행에 대한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에서 9000만 원 상당의 사본 인증 피싱 피해를 입은 B 씨의 상고를 기각하고 은행은 본인 인증 노력을 다했다는 2심 판결을 확정했다.
금융 앱에서 본인 확인을 할 때 실물 신분증을 촬영하는 것과 이미 찍혀 있는 신분증 사본을 촬영하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사진 파일을 제출받아 자동화된 방식으로 행정안전부가 운영하는 신분증 진위확인 시스템을 통해 진정성을 확인하는 절차의 특성상 원본을 바로 촬영한 파일을 제출받는 것과 사전에 촬영된 파일을 제출받는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고 판시했다.
또 신분증 확인 이후 △기존 계좌 확인 △휴대전화 본인인증 △공동인증서 인증 △신용정보 조회 등 2차 확인 절차가 있기 때문에 은행 측은 본인 확인에 대한 노력을 다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애초 비대면 인증에서 신분증 확인은 행정안전부 정보를 통해 신분증상 정보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한 절차가 아니라 거래를 하는 고객이 계좌 명의인 본인이 맞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란 주장이다.
신분증 사본인증 피해자모임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이날 서울 종로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사본을 활용한 정보 진위만으로는 도용 여부 검증은 불가능하다"며 "얼굴을 확인하거나 적어도 신분증만이라도 원본을 제시해야 그나마 본인으로 볼 정당성이 생기는 것"이라고 밝혔다.
휴대전화 본인인증, 공동인증서 등을 통한 2차 인증도 신분증 사본을 이용하면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피해자들의 설명이다.
사본인증 피해자 조 모 씨는 "범인들이 신분증 사본을 이용해 OTP까지 발급받아 돈을 빼돌렸다"며 "사본인증이 가능하다면 2차 인증까지도 도용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박정경 공대위 대표는 "이번 대법원 판례가 나오면서 다른 피해자들의 소송에도 영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어렵겠지만 재심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전문가들도 대법원 판단을 두고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김기창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원 판결에 대해 "금융사가 초래하는 사고 위험을 소비자에게 전가할 뿐 아니라 금융사들이 안전한 거래 기술을 위해 노력하고 투자할 인센티브를 없애버려 더 위험한 거래 환경이 조성되게 만드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유사한 사건을 맡았던 이희용 법무법인 우면 변호사도 "지난 2022년 국정감사에서 금융감독원장도 신분증 원본이 이용돼야 하며 사본을 이용한 본인확인은 정상이 아니라고 답변했다"며 "원본을 소지하고 있는지 금융기관이 확인해 신분증 정보가 본인의 의사에 기해 제시됐는지 함께 검증돼야 한다"고 했다.
ju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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