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추적하고 한국은 잊는다…사각지대 놓인 소방관 정신건강 관리
참사 후 1년 동안은 집중 심리 지원하지만 장기 추적 관리 안 해
美, 9·11 참사 후유증 치료 위해 법령 만들고 추적·치료 지원·통계화
- 권진영 기자, 유채연 기자
(서울=뉴스1) 권진영 유채연 기자 = 이태원 참사 현장을 겪었던 한 서른 살 소방대원이 지난 20일 숨진 채 발견됐다. 실종 열흘 만, 참사 발생 1022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이태원 참사 현장에 지원 투입된 뒤 우울증 진단을 받고 그로 인한 후유증을 앓아왔다.
고인은 참사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망하신 분들을 검은 구역에 놓는데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거나 "'이게 진짜가 아니었으면'이라고 생각했다"고 고통을 내비쳤었다.
소방관은 경찰·응급구조사·기자 등과 더불어 재난 충격의 3차 경험자로 분류된다. 직접적으로 재난을 경험하거나 희생된 1차 경험자와 이들의 가족인 2차 경험자 다음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재난·참사 현장에 파견된 소방관들은 장기간에 걸쳐 정신 건강상 문제를 겪을 수 있음에도 이에 대한 정부의 장기 추적 관찰 노력은 소홀한 실정이다. 이에 2001년 9·11 테러를 계기로 참사 후유증을 겪는 소방관 등을 사실상 평생 추적 관찰하고 치료를 지원하는 미국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정부는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한 트라우마의 한복판에서 공무를 수행한 이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을까.
21일 소방청에 따르면 이태원 참사 현장에 투입된 소방대원은 총 1316명이다. 당국은 참사 직후인 2022년 10월 31일부터 2023년 9월 30일까지 약 11개월 동안을 집중 지원 기간으로 정하고 긴급 심리 지원을 실시했다.
집중 지원 기간에는 현장에 투입된 모든 소방대원을 상대로 총 1629건의 1차 스크리닝 조사(중복 포함)가 실시됐다. 스크리닝은 정신건강의 위험 정도를 알아볼 수 있는 초기 상담 절차다.
이후 심층 상담으로 연결된 소방대원은 고위험군 28명을 포함한 총 142명으로, 모두 334건의 상담이 진행됐다. 병원으로 연계돼 실시된 상담은 178건이다. 이들 비용은 모두 국비로 지원됐다.
집중 지원 기간이 끝난 후에도 지원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매년 '찾아가는 상담실' 제도를 통해 전국 각 소방기관에 직접 방문하는 심리 상담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단, 찾아가는 상담실의 경우 지역별 위탁 의료 기관이 제각각이고 환자의 의료 기록은 철저히 기밀에 부치기 때문에 참사 현장에 파견된 구조 인력의 현 상태를 면밀히 파악하고 기록화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또 1년에 한 차례 실시되는 '소방 마음 건강 설문조사'는 참사 현장 트라우마에만 특화된 조사가 아니다. 국가트라우마센터 역시 '재난 대응인력 소진관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나, 늘 당직과 격무에 시달리는 소방대원들의 자발적 신청에 의존해야 하는 구조적 허점이 있다.
현장 인력의 건강 상태를 추적 관찰하는 것은 향후 재난 대응과 조직원 관리를 위한 기초 데이터로 활용될 수 있지만 '개인 의료 정보'라는 말에 가로막혔다.
이에 전구공무원노동조합 서울소방지부는 오세훈 서울시장을 상대로 지금까지 서울재난본부가 △얼마나 많은 대원들에게 정신 진료·상담을 신청받고 지원했는지 내역 공개 △이태원 참사 출동 대원에 대한 트라우마 전수조사 △향후 관리계획 수립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2001년 9·11 테러라는 초대형 참사로 약 3000명의 인명피해를 경험한 미국은 '월드 트레이드 센터(WTC) 건강 프로그램'을 통해 현장에 투입된 구조 인력의 건강을 모니터링하고 회복을 지원한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 보건복지부(HHS) 산하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속한 국립 직업안전보건연구소에서 관리하는데, '자드로가법'(Zadroga Act)에 따라 오는 2090년까지 연장 시행된다. 참사 발생 후 거의 평생을 추적 관찰하는 셈이다.
이 프로그램은 현직 또는 은퇴 소방관 및 응급 구조대원의 경우 테러 당일부터 약 10개월 이내에 WTC 부지 내에서 단 4시간만 일해도 등록이 가능할 만큼 문턱이 낮다. 대상자는 소방관·경찰·의료진뿐만 아니라 청소 및 자원봉사 인력까지 포함한다.
지원 범위도 폭넓다. 급성 외상성 손상·기도 및 소화기 장애·암·근골격계 질환과 더불어 정신 건강 치료를 지원하며 증상·거주 지역·연령 등에 따른 생존자 수를 통계화한다.
소방대원의 사망이 확인된 전날 이재명 대통령은 "재난, 대형 사고 등으로 인한 집단적 트라우마를 겪는 피해자와 유가족 뿐만 아니라 구조대원과 관계자 모두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이 후유증이 사회 전반의 건강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가 책임 있게 나서겠다"고 공언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들이 당장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우선 정부는 이태원 참사와 무안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등 재난 현장에 투입됐던 소방관과 구급대원 3300여 명을 대상으로 긴급 추가 심리 상담에 나서기로 했다.
그러나 참사 후유증을 겪는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땜질식 처방이 아니라, 미국처럼 보다 촘촘하고 장기적으로 관찰·지원하는 책임 있는 제도와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특임이사는 "재난 대응과 사후 처리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사회적 갈등이 남는다면 구조작업에 참여했던 분들의 마음도 괴로울 수밖에 없다"며 "정부 차원의 재난 대응이 진정성 있고, 피해자와 유가족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구조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도 생존자 죄책감(survivor guilt)에서 벗어나 보람과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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