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문제 해결'보다 '문제 인지' 능력이 국가 경쟁력 [전문가 칼럼]
정해용 신라대 행정학과 교수
"낡은 세상은 죽어가고, 새로운 세상은 태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지금은 괴물들의 시대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정치인인 안토니오 그람시가 남긴 이 강렬한 문장은 오늘날 챗GPT가 열어젖힌 인공지능(AI) 광풍 속에서 표류하는 현대인의 불안을 날카롭게 관통한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투옥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감옥 노트'에 이 글을 적어 내려갔다.
그는 당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죽어가는 낡은 질서가 자기 위기 속에서 권력의 공백을 만들면서도 끝내 사라지기를 거부하고 파시즘이라는 '괴물'을 탄생시켰다고 통찰했다. 그람시가 갈망했던 새로운 세상은 소수의 지배 계급이 폭력과 강압으로 대중을 통제하는 사회가 아니라 피지배 계급이 사회 전반의 헤게모니(hegemony)를 쥐고 자발적인 동의와 연대를 통해 운영되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였다. 그가 바라본 미래는 민중 스스로가 자기 삶과 공동체의 주인이 되는 자율적인 공간이었으며, 강압적인 지배가 사라진 평등한 공동체였다.
오늘날 우리 역시 그람시가 경고했던 '괴물들의 시대'와 유사한 사회 대전환의 길목에 서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곁을 배회하는 괴물은 과거의 정치적 파시즘과는 또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바로 '기술적 괴물'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는 가장 강력한 동력은 급격한 기술의 발전이다.
AI, 로봇공학, 플랫폼 경제로 대표되는 이 변화의 파도는 우리에게 노동과 소유가 사라진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속삭이는 동시에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고 소수의 데이터 권력이 대중을 예속하는 '디지털 봉건주의' 혹은 디스토피아의 그림자를 함께 드리우고 있다.
그람시는 물리적 폭력만으로는 견고한 사회 시스템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봤다. 그는 학교, 언론, 교회와 같은 일상적인 문화·사회적 제도 속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걷어내고 민중의 새로운 문화적·도덕적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장기적인 투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 통찰은 현대 기술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기술 그 자체가 괴물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기술 발전을 단순히 수용하는 차원을 넘어 그 기술이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이제 인간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과거의 인간이 주어진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문제 해결사'의 역할에 집중했다면, AI가 정답을 내놓는 시대에는 '무엇이 문제인가'를 정의하는 '문제 인지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해질 것이다.
기술이 우리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주는 시대가 올수록 정작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우리가 어떤 미래를 원하는지를 예민하게 포착하는 능력이 인간의 핵심적인 역량이 된다. 즉 기술의 자율성이 확대될수록 인간은 기술이 사회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미리 인지하고, 그것을 인간 중심의 가치와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우리가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멈추는 순간, 태어나려고 몸부림치는 미래는 일그러진 괴물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올지 모른다. 그람시가 상상한 평등하고 자율적인 공동체의 꿈이 비록 그의 생전에는 완성되지 못했을지라도 그의 사상은 이후 자본주의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동력이 됐다.
주요국들이 AI 기반의 국가 거버넌스 개혁에 천문학적 투자를 아끼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미래의 국가 경쟁력은 누가 더 정교하고 인간 친화적인 '디지털 행정 생태계'를 구축하느냐에서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이제 행정 인재의 기준은 단순히 매뉴얼을 집행하는 능력이 아니라 기술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창의적 설계 능력으로 옮겨가고 있다.
정부도 AI 전환(AX)과 창의 산업의 결합을 행정 개혁의 핵심 과제로 설정해야 한다. 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를 넘어 미래 상상력을 정책으로 전환하는 '문화 기술(CT) 기반 행정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국가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우리가 미래에 대한 주도적 상상력을 멈추는 순간, 태어나려고 몸부림치는 미래는 일그러진 괴물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화려한 기술적 성취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통해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상상력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보존되고, 기술이 소외된 이들을 위한 도구가 되며, 다수의 자발적 동의가 기술 운용의 기본 원칙이 되는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이러한 상상력이야말로 낡은 질서의 잔해 속에서 탄생하려는 괴물을 저지하고 진정으로 인간적인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게 하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헤게모니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행정이 전 세계가 배우고 싶어 하는 '인간 중심 미래 사회의 설계도'가 될 수 있도록 정부와 대학, 시민 사회가 힘을 모아 새로운 미래 서사를 써 내려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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