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영 칼럼] AI 시대 리더의 자격
이재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20세기 전반부에 세계가 가장 위태로울 때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이 돼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극복하고 미국이 이후 100년 넘게 세계 패권국가가 될 단단한 토대를 확립했다. 개인으로서는 여러 흠결이 있었고 정치인으로서 행보에도 비판받을 점이 많지만, 난세 극복에 필요한 시대정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중의 의지를 하나로 모아내는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힌다.
지금은 해체된 유고슬라비아의 초대 대통령 요시프 티토는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가 있게 만든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파르티잔을 조직해 나치 독일과 싸운 그는 전후에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을 세웠고, 사회주의자였으나 소련에 종속되지 않는 독자노선을 걸으며 나라를 지켜냈다. 티토가 죽은 후 유고슬라비아는 민족 분쟁으로 인해 해체돼 잔혹한 학살이 끊이지 않는 내전을 겪는다. 그렇게 갈등 요인이 많은 여러 민족을 하나로 묶어서 냉전의 거센 파도를 헤쳐 나갔다는 점에서, 티토의 리더십도 시대정신을 정확히 읽은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오늘날 세계 정치는 이른바 '스트롱맨'으로 불리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지도자들이 주도하고 있다. 트럼프, 시진핑, 푸틴 같은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지도자들은 강대국을 이끌면서 독단적 판단, 신속한 결정, 강력한 실행으로 세계 질서를 뒤흔든다. 그로 인해 전후 70년 넘게 지속된 자유주의적 세계 질서는 해체되고, 세계 각국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혼란에 처해 우왕좌왕하고 있다. 대중을 두려워하게 하는 리더십의 강력함만 보면 이 스트롱맨들이 루스벨트나 티토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으나, 그 누구도 이들의 리더십이 훌륭하다고 보지 않는다.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고 역행해 오히려 난세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파괴적인 변화를 거의 매일 겪어야 하는 인공지능(AI) 시대에 시대정신을 정확히 읽는 리더십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된다. 익숙한 삶의 구조를 뿌리부터 흔드는 AI로 인해 우리는 폭풍이 몰아치는 난세의 한가운데를 건너는 처지가 됐고, 그래서 우리 공동체가 탄 배의 선장이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는지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국가는 물론이고 민간 영역의 기업이나 대학까지도 리더가 이런 변화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는지에 따라 하루아침에 운명이 바뀐다. 그래서 우리는 AI 시대 리더가 정확히 읽어내야 할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계속 질문해야 한다.
AI 시대를 이끄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 리더들의 면면을 보면 AI 시대의 리더가 어떤 자격을 갖춰야 하는지, 어떤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지 분명히 확인된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애플의 팀 쿡,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같은 경영자들은 끊임없이 미래를 상상하고 과감하게 도전하며,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런 초거대 기업의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때로는 혁신의 속도에 취해 윤리적 성찰과 사회적 책임을 망각해 기업과 세상을 위험하게 만들기도 한다. 트럼프 집권 이후 일론 머스크가 보여온 성찰 없는 일방적 리더십은 속도와 효율이 전부가 아님을 일깨워준다.
AI 시대 리더에게 필요한 자격으로 우선 꼽아야 할 것은 기술이 바꾸는 변화 방향에 대한 깊은 이해다. 그것이 없다면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해도와 방향타 없이 표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 이해의 전제로 과거의 성공 경험에 집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며 진화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미 정상에 오른 기억에 취해 그 경험의 틀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 리더는 AI 시대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다.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한 실행력도 AI 시대 리더가 갖춰야 할 자격이다. AI 시대의 기술 변화 속도는 이미 우리 사회가 익숙하게 감내할 만한 수준을 멀리 넘어섰다. 바꿔야 할 시점에 리더가 결단하지 못하면 두 번째 기회는 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일론 머스크의 사례에서 보듯이, 속도와 효율만 중시하고 인간 고유의 가치를 지키려는 균형감각이 없다면 위험천만한 리더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윤리적으로 성찰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AI 시대에 리더에게 특히 필요한 자격은 수평적 리더십이다. 상명하달식의 위계적 명령 체계로는 AI 시대의 변화에 대처할 수 없다. 구성원들의 잠재력을 자극해 그들이 자율성과 창의성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야 이 변화 속도를 따라갈 수 있다. 그러려면 구성원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공감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리더가 익숙한 경험에 사로잡혀 구성원의 발목을 잡는 게 흔히 보는 문제지만, 혼자 앞서가면서 구성원과 유리되는 건 더욱 큰 문제다. 구성원이 최대한 협력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내는 게 AI 시대 리더의 과제다.
AI 시대 리더의 자격은 권력이 아닌 영향력으로, 통제가 아닌 조정으로, 지배가 아닌 공존으로 재정의할 수 있다. 일방적 지시와 강압적 추진으로 단기적 복종은 얻을지 몰라도, 장기적 헌신과 창조적 기여를 끌어내지는 못한다. 소통을 통해 집단지성을 활성화하고, 갈등을 성장의 기회로 전환하며, 모두가 기여자가 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명령하지 않고 연결하는 리더, 군림하지 않고 책임지는 리더, 이것이 AI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리더십 패러다임이다.
한국에서 근래 주가지수가 천정부지로 오르는 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양대 반도체 기업의 역할이 절대적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두 기업이 생산하는 메모리 반도체가 AI 경쟁의 관건이 되는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불과 1년 전에 '5만 전자'라고 조롱당하고 위기설에 시달리는 처지였다. 그런 처지가 이렇게 극적으로 바뀐 데는 외부 환경 변화가 크게 작용했지만, 내부 반도체 사업 부문의 리더십 변화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라고 알려졌다. 리더의 자격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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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서울대 인문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학신문 부주간, 교무부처장, 학생처장, 기초교육원장, 인문대학장, 한국연구재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특히 중등교육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국내 대표 중·고등학교 영어교과서(천재교육)의 대표저자이며 현재 한국영어관련학술단체협의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