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포티'는 박찬욱 영화 '어쩔수가없다' 어떻게 봤을까[이승환의 로키]

버티느냐, 원칙 지키느냐의 갈림길

편집자주 ...영어 단어 로키(lowkey)는 '사실은' '은근히' '조용히' 등을 뜻합니다. 최근 영미권 MZ세대들 사이에선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은근히 표현할 때' 쓰입니다. 솔직하되 절제된 글을 쓰겠습니다.

25일 서울도심의 한 영화관에서 관객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다. 2025.9.25/뉴스1 ⓒ News1 권현진 기자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요즘 '영포티'라 불리는 40대는 새천년 이후 'K컬처'의 기운을 실감한 세대다.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계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박찬욱·봉준호·장준환·김지운 등 불세출의 영화인이 등장했다. 그 선두주자는 영화 '올드보이'를 연출한 박찬욱이었다. 올드보이는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작으로 세계인을 매료시킨 K컬처의 상징이었다. 박 감독 특유의 미술 작품 같은 세련되고 독창적인 미장센과 서사가 특징이다.

그 후로 20년이 지나 당시 20대는 '영포티'가 됐고, 당시 40대였던 박 감독은 이순이 지난 60대가 됐다. '영포티'인 필자는 박 감독의 최근작 '어쩔수가없다'를 관람했다. 함께 영화를 본 아내가 극장에서 나오던 중 중얼거리듯 말했다. "여보, 앞으로 우리 돈 많이 모아야겠어."

영화는 실직자 만수(이병헌)와 그의 가족 이야기다. 재직 업체 중역인 만수는 어느 날 해고를 통보받고 마트 노동자로 일하게 된다. 결국엔 생계를 위협받던 만수가 재취업 경쟁자들을 제거하기로 하고 그 과정에서 좌충우돌하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다. 영화는 초현실주의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와 사실주의 거장인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장면을 곳곳에 배치했다. 박 감독은 '올드보이'부터 이어졌던 자신의 '스타일리쉬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관객들의 반응은 엇갈리는 것 같다. 제지 업계 전문가이자 고위직이었던 만수가 아무리 해고됐어도 불과 1년 만에 경제적인 위기로 내몰리는 것이 개연성을 떨어뜨린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저택을 방불케 하는 집을 팔아 전세살이하는 등 다른 선택지가 있는데도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길로 들어설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다만 블랙코미디는 현실의 부조리함을 의도적으로 과장하거나 왜곡해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장르다. '어쩔수가없다'도 웃고 있지만 울고 싶고,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을 우스꽝스럽게 설정해 강력 범죄로 치닫는 실직자 만수의 심적 변화와 범행 동기를 표현한다. 이것이 영화적 재미로 이어졌냐는 취향에 따라 갈리겠지만 남다른 미적 감수성과 독창적인 서사가 여전한 거장의 내공은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비현실적이거나 초현실적이라는 평에 동의하지 않는다. 극 초반, 만수는 동료들의 해고를 반대하기 위해 앞장서는 인물로 그려진다. 당시만 해도 자신이 구조조정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긴 했지만 애당초 본인의 안위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윗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후배와 동료들에게도 좋은 상사였던 것 같다.

그러나 실직을 겪고 나서 만수는 '각성'하게 된다. 재취업 면접을 보던 그는 인공지능(AI) 기술의 발달에 따른 구조조정을 수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 아무리 AI 시대라도 '감시하는 사람 1명은 필요하지 않겠냐'며 자신만 살아남으려 하고, 실제로 살아남는다. 만수는 왜 그렇게 변했을까? 부양해야 하는 가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지키고자 하는 '집'(자산) 때문이었을까. 25년간 몸담은 제지업계에서 뼈를 묻고 싶다는 직업적 사명감 때문이었을까.

어떤 경위에서든 적자생존의 법칙을 새삼 깨닫고 각성하는 만수의 모습은 비현실적·초현실적이 아니라 다분히 현실적이다. 기업·정부 부처·언론 등 어느 조직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각성하지 않으면 살아남았을 수 없다. 지위와 자산과 가족의 생계를 포기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날의 신념과 원칙을 폐기한 기성세대는 자신과 누군가에게 항변하기에 이른다. '내가 변한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라고.

'올드보이'의 세계적인 성취를 눈으로 확인했던 영포티는 머지않아 적자생존 법칙과 신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살아 남느냐, 원칙을 지키느냐의 갈림길에 들어설 수 있다. 이제는 조직 중간관리자가 된 영포티는 이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젊은 날 자신에게 열광했던 팬들을 위한 박 감독의 경고성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mrlee@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