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추석 민심 흔드는 위기의 트라이앵글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 = 추석은 늘 민심이 모이는 시기다.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 정치와 경제, 생활 이야기가 오가는 명절 밥상은 민심의 바로미터다.

그런데 올해 추석 밥상은 유난히 무겁다. 국가 전산망 화재로 드러난 국가 시스템 마비, 국회의 다수당 입법 폭주, 그리고 트럼프발 관세 전쟁의 공포가 국민의 일상을 짓누르고 있다.

세 가지 위기가 겹치며 한국 사회는 '트라이앵글 위기'라는 거대한 파고 앞에 서 있다. 즐거워야 할 추석 귀성길에 국민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는 모습이다.

전산망 마비, '디지털 정부'의 민낯

지금까지 정부는 디지털 행정을 늘 자랑해 왔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정보통신기술(IT) 강국을 내세우면서 디지털 정부의 긍정적 면만 보여줬다. 그러나 국가정보자원관리원에서 발생한 단 한 번의 전산망 화재로 전 국민이 이용하는 국가 행정이 마비되는 국가적 재난이 발생했다. 주민등록 등·초본 발급이 불가능했고, 추석을 앞둔 우체국 배송을 비롯해 금융·민원 서비스까지 차질을 빚었다. 국민은 "버튼 하나 꺼지니 나라가 멈춘다"는 두려움을 체감한 꼴이다.

이는 단순한 IT 기술 문제가 아니라 위기관리 시스템 부재, 안전망 미비 그리고 정부의 과신이 낳은 결과다. 첨단을 자랑하던 한국 정부가 전산망 한 부분의 고장으로 전체 시스템이 중단되는 사실상 '싱글 포인트 실패'(Single Point of Failure) 구조 위에 서 있었음이 드러났다. 국민은 불편을 넘어 불안을 느끼고 있다. '이 나라가 정말 안전한가', '내 정보가 잘 보호되고 있나'라는 근본적 의문을 품기 시작하고 있다.

대전 국가정보자원관리원 전산실에서 발생한 화재로 정부 업무 시스템 가동이 중단된 지난달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청에 무인민원발급기 이용불가 안내문이 붙어 있다. /뉴스1 ⓒ News1 김민지 기자
다수당의 폭주, 삼권분립 침해와 민주주의 위기

국회도 민심을 불안하게 만든다. 다수당은 의석을 무기로 삼아 각종 법안을 쏟아내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것을 강조하고, 적합한 절차를 강조하더니 이제는 절차와 토론은 아예 뒷전인 모양새다. 검찰 개혁, 언론 규제, 재정 확대, 정부 조직 개편 같은 사회적 파장이 큰 사안조차 충분한 공론 없이 강행 처리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다수당의 폭주에 국민은 없다는 것이다. 결국 국민의 정치적 피로도와 정치 무력감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국민은 합의 없는 입법이 갈등만 키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여론도 국회 불신이 해마다 심화하고 있다. 이번 달 한국갤럽 국가 신뢰도 조사에서 국회 신뢰도는 10점 만점에 4.19점으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국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최근 사법부 독립을 위협하는 국회의 움직임에 국민은 국회를 민주주의의 상징이 아니라 권력의 전쟁터로 보고 있다.

추석 밥상 민심은 냉정하다. "정치가 우리 삶을 편하게 해주기는커녕 더 피곤하게 만든다"는 말이 곳곳에서 들리기 시작한다. 다수당의 폭주는 결국 민주주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불안감이 확산하고 있다.

트럼프발 관세 전쟁, 한국 경제의 불안

미국과의 관세 협상도 불안한 모습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한국이 미국에 투자할 3500억 달러(약 490조원)는 선불(up front)"이라고 공식화했다. 한국의 관세 인하 협상에 현금 직접 투자가 선결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한마디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폭탄'이 현실화하고 있다. 현 정부의 관세 협상 설명과 정반대로 배치되는 미국의 요구는 한국의 자동차, 배터리, 반도체가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글로벌 공급망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는 방패 없는 전쟁터에 그대로 내몰리는 꼴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원자재 가격과 환율 변동으로 기업들은 위축돼 있다. 여기에 관세 장벽까지 높아지면 수출 중심 경제는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추석 민심이 경제 걱정으로 가득한 이유다. 서민들은 물가 상승에 신음하고, 기업은 불확실한 미래로 투자 계획을 미루고 있다.

3D 프린터로 제작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모형 뒤로 태극기와 '관세'라는 단어가 나오는 일러스트. 2025.07.23 ⓒ 로이터=뉴스1 ⓒ News1 김지완 기자
정치와 정부에 마지막 경고 보내는 민심

행정의 무능, 정치의 폭주, 국제 경제의 불확실성. 이 세 가지가 동시에 닥칠 때 국가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우리 국민은 불안과 분노, 피로,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늘 정치와 정부에 등을 돌린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협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온다는 말이 있다. 지금 한국은 바로 그 위험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석 연휴는 늘 정치권이 민심을 살피는 시간이다. 그러나 올해 민심은 그 어느 때보다 거칠고 불안하다. 전산망 하나 멈췄다고 나라 전체가 흔들리고, 국회는 숫자만 믿고 폭주하며, 세계는 다시 보호무역의 파고로 몰아넣고 있다. 국민은 이 세 가지를 동시에 겪으며 '과연 이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정부와 정치권은 지금의 위기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국민은 위기를 잊지 않는다. 추석 밥상에서 오간 불만은 내년 선거의 표심으로 이어진다. 정치와 정부가 국민의 불안을 방치한다면, 그 대가는 혹독할 수밖에 없다.

"전산망은 멈추고, 다수당은 폭주하고, 세계는 관세 전쟁 중"이라는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오늘의 한국이 직면한 현실이다. 이 위기의 트라이앵글 앞에서 정부와 국회가 절제와 책임 그리고 냉철한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국민은 새로운 선택을 할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냉혹한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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