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는 정이 좋다" 보라매 장기원은 화기애애…탑골공원은 '장기판 철거'

보라매공원, 야외 장기 공간 새 단장 계획
탑골공원 노인들, 장기판 철거 뒤 떠돌이 신세

26일 서울 동작구 보라매공원에 위치한 '장기원'에서 노인들이 장기를 두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울=뉴스1) 이정환 기자 = 땅! 땅! 장기알을 내려놓는 소리가 서울 동작구 보라매공원에 울려 퍼졌다. 가을 날씨가 만연했던 지난 22일 보라매공원에선 60여명의 노인이 공원 한편에 위치한 정자 '장기원'에 모여 장기를 두고 있었다.

노인들은 장기판이 설치된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장기에 열중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얇은 외투를 걸친 60대 남성은 맞은 편에 한 60대 여성을 앉혀두고 장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한 노인은 "지금도 허리 많이 아파요?"라면서 상대방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신대방동에 거주하는 김정일(62) 씨는 "8개월 만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 장기원에 들르니 한민족을 만나 기쁘다"며 "장기를 두며 사람과 사람 사이 오가는 정이 특별히 좋다. 서로 호흡이 통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날 장기원에는 노인 수십 명이 모여 있었지만, 길바닥에는 담배꽁초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장기원에서는 △고성·훈수·싸움 금지 △음주·흡연·기물파손 금지 △불쾌감을 주는 언행과 옷차림 주의 등의 규칙을 명시하고 있었다.

정자 한쪽에 부착된 '보라매장기동호회'의 안내문에서는 장기원을 '노인쉼터'라고 소개하며 '우리 회원님들 인사합시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오만성 보라매장기동호회 총무는 "동호회를 만들어서 회원들끼리 질서를 유지하고 같은 식구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려고 한다"며 "비회원이라고 무시하는 일 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말했다.

26일 서울 동작구 보라매공원에서 노인들이 장기에 열중하고 있다. 장기판 왼쪽에 앉은 김 모 씨(75·남)은 "탑골공원에서 장기를 두다가 장기판이 없어져 보라매공원으로 나왔다"며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던 장소가 사라지니 좀 섭섭하다"고 말했다.

본래 장기원도 탑골공원처럼 노인들이 야외 벤치에 앉아 장기를 두는 곳으로 출발했다. 보라매공원 한구석에 장기 두는 노인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해 세월이 흐르자, 하루에도 수십 명이 찾는 '장기 성지'가 됐다. 장기원을 찾는 노인 중에서는 "매일 탑골공원을 찾다가 장기판이 없어져 보라매공원으로 나왔다"는 사람도 있었다.

야외 시설이라 폭염과 추위를 막을 수 없다 보니 서울시는 장기원을 이용하는 노인들을 위해 약 165㎡(50평) 규모의 시설을 보라매공원 내부에 건립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예산 규모 5억원가량의 계획이 확정되면 내년 상반기에 준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오랫동안 공원을 이용하셨던 어르신들을 위해 쾌적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설물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계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탑골공원은 '장기판 철거'…"장기판 치운다고 노숙자 사라지지 않아"
25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내에서 노인들이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다. 탑골공원에서는 '바둑, 장기 등 오락행위, 흡연, 음주가무, 상거래 행위 등은 모두 금지된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탑골공원은 3.1 독립정신이 깃든 국가유산 사적입니다. 공원내 관람분위기를 저해하는 바둑, 장기 등 오락행위, 흡연, 음주가무, 상거래 행위 등은 모두 금지됩니다.'

반면 '장기 성지'로 유명했던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는 장기판이 모두 사라졌다. 지난 7월 31일 종로구청과 종로경찰서가 장기판을 철거했기 때문이다.

탑골공원 내부에서는 등산복 차림의 노인들 10여명이 줄지어 벤치에 앉아 공원 담장 벽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인근에는 노인 노숙인도 몇몇 눈에 띄었다.

탑골공원 인근 음식점 테이블에서 장기를 두던 김 모 씨(80·남)는 "행패 부리던 사람들은 장기와 상관없는 부랑자나 취객들이었는데 애꿎은 장기 두는 사람들만 피해를 보았다"며 "장기도 두고 옛날얘기도 하던 자리가 사라지니 노인들이 팔각정에 앉아 있기만 하신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이날 만난 노인들은 장기판을 찾던 사람들이 인근의 종묘광장공원 등 서울 전역으로 흩어졌다고 전하며, '탑골공원의 소란은 장기판이 없어진다고 해결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여가 공간은 고립을 예방하고, 노인 건강과 정서적인 측면에서 모두 중요하다"며 "그동안 여러 차례 문제가 계속됐던 만큼 장기판 철거는 적절했다고 보지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분들을 위한 여가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jwlee@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