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몇 명이 더 죽어야 '안전이별' 할 수 있을까

여태경 사회정책부장

(서울=뉴스1) 여태경 사회정책부장 = 지난 5월 경기 화성시 동탄에서 30대 여성이 옛 연인에게 납치된 뒤 살해됐다. 피해자는 경찰에 9번이나 신고했지만 목숨을 잃었다.

그 후로도 '3번 신고했는데 비극으로 끝난 의정부 스토킹 살인', '전 여자 친구를 살해한 장재원', '스토킹 살인미수 장형준', '현직 대학교수의 헤어진 연인 성폭행·스토킹', '도쿄 교제 살인 한국인 남성 체포' 등 하루가 멀다 하고 비슷한 사건들이 보도되고 있다.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까지 '교제살인' 보도가 나오고 있지만 최근 국회에서 토론회가 한번 열렸을 뿐 정치권은 여성에 대한 폭력에 사실상 침묵하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발표한 '언론 보도를 통해 본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한 여성살해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2024년 한 해 동안 언론에 보도된 '친밀한 관계 내 여성살해'는 최소 181명, 살인미수 등으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374명으로 나타났다. 자녀, 부모, 친구 등 주변인 피해자 수를 포함하면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한 피해자 수는 최소 650명에 달한다.

언론에 보도된 사례를 분석한 것만 이 정도니 실제 피해사례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하루에 한 명꼴로 교제폭력·살인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지만 공식적인 국가 통계는 없다. 공식 통계가 없는 이유는 법적인 정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범죄에 대해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거나 '사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범죄를 막고 처벌해야 할 위치에 있는 수사기관이나 사법기관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경찰이 접수한 친밀한 관계 폭력의 절반 이상은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아서', '단순한 말다툼이나 시비 등 사안이 경미해서' 등의 이유로 현장 종결로 마무리된다.

우리나라에서 교제폭력 대부분에 적용되는 형법상 폭행·협박죄는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제폭력 피해자들은 처벌을 원한다고 말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다.

이미 폭행과 협박이 반복되고 있는 상황에서 피해자에 대해 너무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가해자에 의해 언제 다시 폭행이나 살해를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 더 나아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사건을 접수하겠느냐" "처벌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피해자는 선뜻 "처벌을 원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결국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더 위험한 범죄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상당 기간 가스라이팅 당한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처벌을 묻는 것은 피해자에게 처벌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주는 것이 아닌 책임만을 떠넘기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경찰청이 '교제폭력 대응 종합 매뉴얼'을 발표하고 교제폭력 사건에서 피해자가 처벌불원 의사를 밝혀도 직권 개입할 수 있는 스토킹처벌법을 적극 적용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하지만 갈 길은 멀어 보인다. 피해자의 신고가 어렵사리 경찰의 접근금지, 구금 등 잠정조치 신청까지 이어지더라도, 검찰에서 "지속적이거나 반복적이지 않다" "동종전과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되는 경우도 많다. 법원 단계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가해자가 초범이나 주거가 확실하다는 이유로 풀어주는 사례도 있다.

전문가들은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은 신체적인 폭력 같은 유형적인 피해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 폭력의 범죄 특성과 심각성을 인식하고 초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증가하는 교제폭력을 막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해외에서는 폭행이나 상해가 없더라도 교제폭력의 전조 증상에 해당하는 '강압적 통제'만으로도 처벌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국회에서는 교제폭력 관련 법안들이 매년 폐기되고 있다. 22대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이 여러 건 발의돼 있지만 진척은 없는 상황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시절부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삼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혀왔다. 그 국민에게 예외는 없을 것이다.

이제 국가는 '한명도 더 잃을 수 없다'는 의지를 갖고 범정부 차원의 대응을 해야 한다. 목숨을 건 이별이 아니라 안전한 이별을 할 수 있도록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줘야 한다.

최근 여성가족부 장관에 취임한 원민경 장관은 "날로 변화하는 젠더폭력에 대한 신속한 대응과 아울러 더욱 섬세한 피해자 중심 지원체계를 갖추겠다"며 "폭력예방교육은 물론 피해자 긴급 보호와 심리적·법적 지원을 강화해 우리 사회가, 우리의 일상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젠더폭력과 피해자 보호에 대해 누구보다 전문성을 갖춘 여가부 장관의 이 같은 발언은 이번에는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

다만 여야를 막론하고 언제든 강성 지지층에 휘둘릴 수 있는 상황에서 여가부 폐지는 또 나올 수 있고, 피해자가 피해호소인으로 둔갑할 가능성은 여전하다. 어느 부처보다 부침이 심했던 여가부의 수장이 이번에는 성평등이라는 목표를 향해 제대로 방향키를 잡고 좌초하지 않고 끝까지 항해하기를 기대해 본다.

haru@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