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6만원'만 갖고 사흘 살았더니 비로소 깨달은 것[만원의한숨]④
현금만으로 생활하는 '현생족' 직접 체험…'짠테크' 도전
'세종대왕' 새겨진 만원 지폐 받아줄 곳조차 찾기 어렵네
- 장성희 기자
(서울=뉴스1) 장성희 기자 = 신용카드에서 지폐로 돌아온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현금생활족'(현생족)이다. 휴대전화 하나로 계산이 가능한 시대에 이들은 현금이 든 바인더(현금을 분류해 넣을 수 있게 만든 수첩)를 챙겨 외출한다. 현생족은 통신비와 교통비 등 고정지출을 제외한 소비의 대부분을 현금으로 해결한다.
카드 사용으로 받을 수 있는 캐시백과 제휴 혜택을 포기하는 대신 얻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지출을 최대한 막는 것이다. 요컨대 현금 생활은 고물가 시대에 나타난 짠테크(짠돌이+재태크)의 한 유형인 셈이다.
지난달 30일부터 1일까지 사흘간 기자가 직접 현생족으로 살아봤다. 예산은 하루 2만원으로 잡았다. 평소 평일에 지출하는 금액의 60~70% 수준이다. 목표는 단순했다. 예산보다 더 아끼기.
◇'집밥'이 '재테크'라더니
현생족 생활 첫날인 월요일 아침. 근방에서 가장 저렴하다는 무인카페로 향했다. 현금 생활의 취지를 고려하면 커피 자체를 안 마셔야겠지만 각성제인 카페인 없이 한주를 시작하기 어려웠다. 커피값이라도 아끼자는 심산으로 무인카페 문을 열었다.
그러나 키오스크 앞에서 금세 좌절해야 했다. 현금을 넣는 입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휴대폰과 카드로 결제할 수 있는 리더기만 기계 우측 하단에 달려 있었다. 화면에서는 '시작하기' 버튼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팔랑거리는 지폐를 품에 안을 곳은 없었다. 결국 '각성'하지 못한 채 출근길에 올랐다.
인쇄를 하려고 찾은 도서관에서도 '벽'을 느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이 도서관의 인쇄기엔 카드 리더기만 붙어 있었다. 직원에게 물었더니 "카드로 계산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확실히 현금 생활은 효과적이었다. 현금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으니까, 지출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현금을 주로 쓰는 노년층은 이런 난감한 순간들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원래 동방예의지국이 아니었나. 지폐 속에 새겨진 위인들의 초상을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빠졌다.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종대왕님과 생전 왕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던 율곡 이이 선생님과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인성 교육'을 중시한 퇴계 이황 선생님은 요즘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현생족의 목표를 되뇌었다. '근검절약'이었다. 현금 생활을 한다는 한 누리꾼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한 달 기준으로 적게는 30만원, 많게는 100만원이 절약됐다"고 적었던 것을 되새겼다.
그러나 퇴근길 위기의 순간이 들이닥쳤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데 고소하고 담백한 냄새가 일대에 퍼지고 있었다. 진원지는 치킨집이었다. 서울 서북부에서 경기 남동부까지 지옥철을 뚫고 왔다는 보상 심리가 이미 마음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이성을 잃고 배달 앱을 켰다. 아끼고 아꼈던 쿠폰과 함께 하루치 예산의 3분의 1가량(7000원)을 지불했다. 바삭거리는 튀김 옷을 단숨에 깨물어 분쇄하자 포만감이 차올랐다. 곧이어 현실 자각 시간이 도래했다. 세종대왕님 한 분은 퇴계 이황 선생 세 분으로 뒤바뀐 뒤였다.
이렇게 소비하다간 만원조차 모으지 못할 판이었다. 과도한 지출을 야기하는 습관을 끊어내기로 했다. 집에서 저녁을 먹으면 식사 시간이 늦어진다는 이유로 보통 저녁 식사를 밖에서 해결했었다. 간단한 저녁이 술자리가 되고 술자리가 2, 3차까지 이어진 것이 여러 번이었다. '집밥이 재테크'라는 어디서 본 말을 웅얼거렸다.
◇채찍만으론 안 된다…때론 '당근'을
사실 현금생활에서 가장 절약할 수 있는 항목은 점심값이었다. 런치플레이션(런치+인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에 걸맞게 대부분 메뉴는 8000원을 기본으로 깔고 시작한다. 대학교 저학년 시절 즐겨 찾던 5000~6000원 메뉴의 식당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삼각김밥이나 컵라면으로만 점심을 해결하며 스스로를 극한으로 밀어 넣지는 않았다. 직장인들이 지불한다는 평균 점심값인 7761원 안팎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3일 차 점심에는 그날따라 먹고 싶던 8500원어치 돈가스와 비빔국수 세트를 먹었다. 자신에게 채찍만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때론 당근을 줘야 한다는 것이 현금 생활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었다.
그렇게 사흘간 현생족으로 살면서 1만9100원을 모았다. 총 예산이 6만원이었으니 거의 하루치 예산을 절약한 셈이다. 1만9100원으로 1만7900원짜리 로션을 구매하고도 1200원이 남았다. 소비를 조금만 억제하고 대체품을 부지런히 찾으면 기대보다 많은 금액을 아낄 수 있었다.
현금 생활은 카드 생활과 다르긴 달랐다. 수중에 있는 금액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갑을 열 때마다 남은 예산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 계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 없는 소비를 애초 할 수 없는 조건이었던 셈이다.
아끼고 아끼려는 현금 생활을 통해 깨달은 것은 하나 더 있다. 지금 나의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이다.
치즈돈가스를 꾹 참고 가격이 더 저렴한 일반 돈가스를 고르던 취업준비생은 지난 7월부터 월급을 받아 치즈돈가스 세트에 콜라 하나는 얹을 수 있는 사회인이 됐다. 카드를 마구 긁는 것처럼 초심을 잃는 순간이 온다면 취준생 시절 먹던 '일반 돈가스' 맛을 떠올리기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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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2000년 '서민 음식의 대명사' 자장면 평균 가격은 2742원이었다. 만원이 있으면 세 끼를 먹고도 돈이 남았다. 그래서 한때 '만원의 행복'이란 신조어가 유행했으나 이제 까마득한 옛말이 됐다. 2023년 '자장면 7000원'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수중에 있는 돈이 만원 뿐이라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 고물가 시대를 어떻게 버텨야 할까. <뉴스1>이 집중 진단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