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에 갇힌 삶…거식증은 '나도 모르게' 찾아왔다
[섭식장애를 아시나요] ③PT로 찾아온 강박…폭식 뒤엔 죄책감
먹토·폭토가 어느새 습관으로…'거식증 탈출 일기'로 의지 다져
- 이정후 기자, 박상휘 기자, 박동해 기자, 박혜연 기자
(서울=뉴스1) 이정후 박상휘 박동해 박혜연 기자 = 이수영씨(가명·24·여)는 두 달 전부터 자신의 블로그에 섭식장애 극복기를 쓰고 있다. 올해 초 갑자기 나타난 거식증을 치료하면서 시작한 일이다. 그동안 쓴 일기에는 그날그날의 사소한 일상과 더불어 무엇을 먹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수영씨의 솔직한 감정들이 담겨 있다.
수영씨는 일기를 쓰면서 "스스로 거식증에 걸렸단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동안 억지로 음식을 게워 내며 '소화가 안 돼서', '급하게 먹고 체해서'라는 핑계를 댔던 그였지만 기록을 통해 비로소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수영씨의 '거식증 탈출 일기'는 또 하나의 치유 과정이었다.
◇ 한번 시작하자 습관된 '먹토'…거식증으로 '미끄러지다'
올해 초 수영씨는 코로나19에 걸렸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손은 자꾸 음식을 향했고 폭식을 하는 횟수도 늘었다. PT(퍼스널 트레이닝)를 받고 있던 수영씨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먹었던 음식을 게워 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제 몸 안에 음식물이 들어있는 느낌이 너무 싫어서 처음으로 구토를 했어요. 저는 그동안 건강하게 살을 뺐기 때문에 '먹토'(먹고 토하는 행위)나 '폭토'(폭식 후 토하는 행위)는 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제가 그렇게 살고 있더라고요."
몇 년 전 80㎏대에서 50㎏대로 감량할 때도 먹는 것에 큰 제한을 두지 않고 살을 뺐던 수영씨였다. 남들은 다이어트를 위해 복용한다는 식욕억제제도 먹지 않았다. 누구보다 건강하게 다이어트에 성공했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섭식장애는 갑자기 찾아왔다.
처음 경험한 '먹토'는 금세 습관이 됐다. 음식을 게워 낸 후에는 달갑지 않은 개운함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섭식장애로 '미끄러져 버린' 수영씨는 토를 하고 난 뒤 거울 앞에 서서 생각했다. '나 지금 제정신 아니구나.' 그날 저녁 수영씨는 부모님께 자신의 상황을 털어놨다. 섭식장애 치료는 자기 부정을 극복하는 게 첫 번째 관문이다. 수영씨는 자신의 문제를 빨리 인지한 편이었다.
◇ "조금만 더, 조금만 더"…감량과 함께 찾아온 강박
현재 51㎏인 수영씨는 과거의 자신을 '통통과 뚱뚱을 오가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173㎝의 큰 키와 80㎏ 초반의 체중이었지만 몸무게에 대한 강박은 없었다. 영화 관련 학과를 전공해 날씬한 배우들을 자주 만났어도 수영씨에게 이들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일 뿐 동경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랬던 수영씨가 운동에 재미를 붙이자 체중계의 앞 자릿수가 바뀌기 시작했다. 살이 빠지자 마음에 드는 옷을 선택할 기회가 많아졌고 연애도 시작하게 됐다. 몸무게를 더 줄이고 싶어 본격적인 식단 관리에 눈을 돌린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연애는 몸매에 대한 스트레스만 심어줬고 수영씨는 스스로를 더 조이기 시작했다.
PT를 등록한 수영씨는 식단 검사까지 받으며 먹는 것을 제한했다. 목표로 했던 하루 섭취 칼로리를 초과하면 다음 날은 제로 칼로리 음료와 사과 한 개로 하루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수영씨는 "PT를 시작하면서 섭식장애가 심해졌다"고 했다.
"기대치가 높았던 거죠. 57㎏까지만 빼고 유지하려고 했는데 (57㎏을 달성하면) '55㎏까지만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고, 53㎏까지 빼면 '50㎏까지만 가볼까?'하는 생각이 들고요. 막상 50㎏를 찍으니까 앞자리 4를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더라고요." 수영씨는 결국 48㎏까지 감량했다.
PT는 성취감과 함께 원하지 않았던 강박증을 함께 가져다줬다. 수영씨는 하루에 1300㎉(킬로칼로리) 이상을 섭취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게 됐다. 주변 친구들에게 고민처럼 이야기를 털어놨지만 그럴 때마다 수영씨는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사이 음식에 대한 강박은 커졌고 섭식장애는 조금씩 자랐다.
◇ 마른 몸매 동경하는 '프로아나'…스스로 조이는 10·20대
수영씨는 PT를 받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음식에 대한 강박이 크지 않았다. 인터넷을 통해 '프로아나'(거식증을 동경하는 문화) 이야기를 들어도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발견한 자신의 모습은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프로아나'들은 마른 몸매를 동경하며 음식 섭취를 철저히 제한한다. 장시간 물만 마시며 버티거나 폭식 후 구토를 하는 식이다. 주로 10·20대 여성들인 이들은 마른 사람들의 사진을 공유하며 함께 몸무게를 '조일' 친구들을 찾는다.
<뉴스1>이 SNS를 통해 접촉한 A양(17)은 음식 섭취를 최대한 줄이는 방법으로 살을 빼고 있었다. A양의 키는 158㎝, 몸무게 41㎏으로 체질량지수(BMI)는 이미 정상 범위에 미치지 못하는 저체중이었다.
"주변에서 '말랐다', '더 먹어라'고 해주니까… 살이 찌면 이런 말을 못 듣는다는 생각에 말라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 것 같아요." 마른 몸매를 가져야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A양은 목표 체중인 37㎏을 위해 매일 단식과 운동을 반복한다고 했다.
A양은 최근에는 살을 빼기 위해 마약류로 분류되는 식욕억제제 '디에타민'까지 손을 대 경찰 조사까지 받았다. A양은 인생에서 외모가 차지하는 중요도가 어느 정도 되냐는 질문에 "10점 만점에 8점"이라고 답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하게 인식되는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청소년들도 자유롭지 못했다.
◇ "외모에 집착하는 사회…섭식장애 더 알려졌으면"
수영씨는 A양처럼 자신과 같은 섭식장애를 겪고 있는 청소년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블로그에 꾸준히 극복기를 쓰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어느 분께서 제 일기를 보고 난 뒤 자신도 거식증과 먹토를 고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댓글을 달아주셨어요. 저를 위한 기록이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기를 계속 쓰게 된 것 같아요."
자신의 하루를 기록하면서 수영씨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여전히 먹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속을 게워 내지만 그 빈도는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담당 의사는 수영씨의 기록하는 습관을 '좋은 습관'이라며 응원을 보냈다. 주변인들의 응원에 섭식장애와 함께 찾아온 우울증도 점점 나아지고 있다.
수영씨는 "섭식장애를 가진 게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치료될 수 있는 질병인 만큼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에서다. 오히려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요즘, 무리하게 굶는 다이어트의 부작용이 얼마나 위험한지 수면 위로 더욱 올라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요즘 예쁘다는 여자 아이돌은 누가 봐도 말랐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먹고 운동을 하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게 없어요. 보이는 것만 강조하면서 섭식장애 문제를 덮어놓는 건 모순이라고 생각해요. 제 블로그 이웃 중에서 학생들이 토를 하고 자괴감의 일기를 쓰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요, 그 친구들이 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 기획취재팀(박상휘 팀장, 박동해·박혜연·이정후 기자)
leej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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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섭식장애를 앓는 인구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심지어 섭식장애를 앓는 연령대는 갈수록 어려지고 있는데, TV 속 앙상한 몸으로 연기하고 춤추는 연예인을 예쁘다고 생각하는 청소년들은 향정신성 의약품을 불법으로 구입하고 복용해 사회적 우려를 낳고 있다. 섭식장애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지만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젊은 여성들'만의 문제로 취급한다. 뉴스1은 섭식장애를 앓고 있거나 이를 극복해나가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우리 사회가 이 질병을 어떻게 접근하고 해결해야 할지 6편의 기획물에 담았다.